[백상논단] 실패한 정부 가질 여유가 없다

김선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통합·적폐청산 내세운 새 정부
과거정권 패착서 자유롭지 않아
먼저 자신의 과오부터 성찰하고
대내외적 당면과제 헤쳐나가야

필자는 귀국한 후 이번을 포함해 모두 네 번의 대선을 겪었다. 필자의 경우 매번 대선이 끝나면 가장 주의 깊게 보는 부분이 하나 있다. 당선자가 첫마디로 무슨 얘기부터 하는가이다. 지난 5월9일, 별 이변 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나라 제1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당선 소감으로 맨 먼저 모든 국민들에게 감사한 뒤 곧이어 함께 경쟁했던 후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들에게도 섬기는 대통령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매번 대선을 통해 당선자로부터 제일 처음 듣고 싶었던 말이며 이전 세 번의 대선에서는 듣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솔직히 필자는 그 말 때문에 이 정부에 한번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한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아울러 통합을 갈구하는 지도자로서의 진솔한 초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보수정권은 무능과 탐욕스러움으로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은 지독한 무능과 도가 넘는 오만함으로 국민들에게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정치적 환멸을 안겨주었다. 그렇기에 지난 6개월 동안 그 많은 촛불들이 주말마다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평소 정치색과는 전혀 무관했던 국민들까지도 거기에 다수 동참했던 것이다. 결국 그 동력이 ‘적폐청산’을 선거구호로 내건 문 대통령을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적임자로 선출한 셈이다.

그런데 과연 정권의 무능과 탐욕스러움이라는 것이 지난 9년 동안의 보수정권에서만 발견됐던 특성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 이전 10년 동안의 진보정권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이유로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심판을 받았으며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은 그로부터 탄생된 정치적 산물인 셈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보수세력이 각고의 자기반성과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반사이익만으로 정권을 쥐었던 데 있으며 이제 우리는 자기혁신의 노력 없이 단순한 반사이익만으로 창출된 정권의 결말이 어떤가를 똑똑히 목격했다.


이번 정부의 핵심인사들은 9년 전 스스로를 정치적 폐족(廢族)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그동안 정권 재창출을 위해 어떤 자기혁신의 노력을 해왔을까. 지난해 총선 직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당이 쪼개질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가 기사회생한 적이 있다. 상대방의 엄청난 정치적 실착으로부터 어부지리(漁夫之利)를 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난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오만도 전적으로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몫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국회선진화법’이다 뭐다 해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던 이번 정부가 같이 짊어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해 ‘적폐청산’의 대상은 지난 정권의 행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초심이 그렇다면 우선 그들은 과거 자신의 과오부터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진솔하게 양해를 구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아니라면 이번 정부 역시 같은 방식으로 험난한 정치 여정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불길한 조짐이 요 며칠 사이 총리 및 몇몇 장관들의 인사청문회를 통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결코 지명자들에 대한 흥미위주식 사생활 파헤치기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행태는 차치하더라도 인사청문회에 참여한 야당의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신상털이와 문자 폭탄은 대다수 국민들의 눈에 건전한 민주주의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문자 폭탄’이 아니라 ‘문자 행동’이 맞는다는 한 여당의원의 가벼운 레토릭(rhetoric)은 마치 지난 정권에서 보았던 오만함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호는 대내적으로 소득 양극화, 저출산, 그에 따른 저성장 등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들로 과적된 상태에서 대외적으로 신패권주의로 무장한 주변 열강들 사이에서 북핵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슬기롭게 넘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실패한 정부를 가질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김선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