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적폐'없애라] '데스밸리' 넘는데 써야 할 돈을...20년된 중기 4,500곳이 받아가

<2>나랏돈을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
5년간 정책자금 75조 퍼붓고도 '히든 챔피언' 못키워
사업조정할 기구 없이 건수만 늘려...올해만 1,300개
"중기부 된다고 해결안돼...유사·중복지원 뿌리 뽑아야"

지난해 2월22일부터 사흘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GSMA 모바일 전시회. 다른 나라들은 ‘미국관’ ‘영국관’ 등 국적별로 한 개의 국가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한국만 두 개였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하는 것과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한 한국관이 각각 마련돼 있었다. 부처가 소통이 안 돼 국제전시회에 참가하는 중기를 각자 지원한 것으로 산업부가 2월 초에 깨닫고 미래부에 부랴부랴 조정을 요청했지만 미래부는 시간이 촉박해 응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결국 같은 나라 부처끼리도 말이 안 통해 생긴 일로 참가자들 입에 오르내리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감사원은 올해 초 대표적인 중기 중복 지원 사례로 적발하고 주무 부처인 산업부에 ‘주의’ 조치를 내렸다.

지난 5년간 중소기업에 75조원의 혈세를 쏟아붓고도 그럴듯한 중소기업 하나 키워내지 못한 주된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의 중기 지원 중 절반가량은 정책금융, 나머지는 기술·인력 등 예산 지원인데 유사·중복 문제가 도를 넘어선 상황이다.

우선 2013년부터 올해까지 중기 지원 예산(정책금융, 기술·인력지원 등 모두 포함)은 총 74조9,000억원에 달한다. 성적표는 이렇다 할 ‘히든챔피언(규모는 작지만 강한 기업)’ 하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오래된 기업들이 정책자금을 받아가는 것을 두고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실제 2015년 기준, 업력 20년 이상 기업은 4,500개 안팎이, 10년 이상 기업은 1만4,000여개가 정책자금을 타갔다. 물론 문제는 없다. 하지만 정책자금은 창업 5년 이내 기업이 성장의 한계를 맞게 되는 ‘데스밸리(Death Valley)’를 넘도록 돕는 데 집중돼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래된 기업에 대한 지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업력이 길수록 반복 수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2015년 중복 지원으로 지적한 자료에 따르면 A 중소기업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개 부처의 8개 중기 지원 사업으로 총 943억원의 지원을 받았다. B 기업 역시 5개 부처의 31개 사업으로부터 총 300억원을 받았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부터 3년간 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네 번 이상 수혜를 받은 기업은 무려 299개에 달했다. 한 기업이 A 부처, B 부처로부터 창업 지원을 받고 이듬해에도 같은 사업으로 C 부처 등에서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유가 뭘까. 백훈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기 지원 사업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1988년 대통령 직속 ‘중기특별위원회’가 설립돼 중기 사업의 심의·조정 기능을 수행, 유사·중복을 어느 정도 걸러냈다. 2008년 위원회가 폐지되고 청와대 내에 ‘중기 비서관’으로 갈음했지만 사업 심의·조정기능을 잃었다. 현재는 중기청이 문제를 발굴해 기획재정부에 건의하고 있지만 기관장이 차관급인 ‘청’ 단위의 의견이라 장관이 버티는 각 ‘부’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실제 이에 따라 절감된 예산은 2014년 158억원, 2015년 422억원, 지난해 250억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전체 중기 예산(16조5,000억원)의 0.2%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기 지원 사업 수는 연간 1,300개가 넘을 정도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중기청에 따르면 올해 중기 육성 사업 예산은 16조6,000억원, 사업 수는 1,347개다. 중앙부처 18개에서 288개, 17개 지방자치단체에서 1,059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방은 예비타당성의 칼날도 피해가며 계속 사업 수를 늘리고 있다. 국가재정법에 따라 기재부는 300억원 이상의 나랏돈이 들어가는 사업은 예비타당성을 거쳐 적격성을 심사한다. 하지만 지자체는 10억원, 20억원 단위의 사업을 편성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고 계속 사업 수를 늘리고 있다.

백 연구위원은 “새 정부가 중소벤처기업부를 만든다고 하지만 단순히 예산만 불린다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사·중복 사업을 개혁할 특단의 조치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성과를 못 낼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중기부 내 ‘정책심의회’를 설치해 전 부처, 각 지자체에 흩어진 중기 사업을 조정·심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역시 유사·중복이 많은 연구개발(R&D) 예산, 고용 예산도 각각 미래부 산하의 ‘과학기술심의회’, 고용노동부의 ‘고용정책심의회’ 등으로 나름 조정을 하는데 중기 예산은 심의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국고 지원액이 300억원이 안 되더라도 중기 지원 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게 해 지자체 중기 지원 사업도 유사·중복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 지난해 기재부와 중기청은 KDI에 중기 지원 효율화 방안 연구용역을 발주했으며 최종 작업 단계다. 중기부는 정부조직법 통과 후 대대적인 수술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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