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최태원, 이재용, 그리고 정주영의 '가보지 않은 길'

적자 하이닉스 인수했던 SK
불가능한 도전 성공한 현대…
韓 기업 가야할 길 자문케 해



홍준석 산업부장 jshong@sedaily.com

# 지난 15일 예정된 도시바 반도체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미뤄진 가운데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체가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을 보면 하이닉스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분기 3조원의 이익을 내는 초우량 기업이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적자투성이 회사였으니 말이다.


이런 회사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수를 밀어붙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결단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2011년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는 투자와 연구개발은커녕 수조원대의 부채와 누적 손실로 사실상 껍데기나 다름없었고 반도체 절대 강자 삼성전자가 버티고 있어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 회장은 오히려 시가보다 10% 비싼 3조4,267억원을 베팅했다. 4차 산업혁명 도래 시 반도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당당히 ‘가보지 않을 길’을 택한 것이다. 미래의 몇 수를 내다본 안목, 과감한 도전정신, 이런 게 오너십인가 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국 최 회장의 고독한 결단은 SK에 ‘신의 한 수’로 돌아왔다. “에너지·정유 기업이 왜 반도체를 하느냐” “돈만 쏟아붓다 그룹까지 어렵게 할 것” “경쟁력도 없고 전망도 극히 비관적” 등의 숱한 걱정은 기우였다. SK는 에너지·화학 중심의 포트폴리오에 정보통신기술(ICT)이 추가돼 어느 그룹보다 안정적이고 견고한 수출그룹으로 탈바꿈했다. 하이닉스를 품은 SK와 과거의 SK는 완전 딴판일 정도로 하이닉스는 그룹의 황금알이 됐다.

# 17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지 4개월이 됐다. 선장은 없지만 외견상 삼성호는 순항 중이다. 올 1·4분기에 10조가량의 영업이익을 올렸고 2·4분기에는 역대 최고 실적이 확실시된다. 혹자들은 얘기한다. 이 부회장이 없어도 삼성이 잘 굴러간다고. 하지만 삼성의 불안감은 커져 간다. 몇 년 후에 삼성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달콤한 결실은 수년 전 이건희 회장의 대대적인 투자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당연히 앞으로 4~5년 뒤를 내다본 전략과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데 오너십 부재 상황에서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부회장 구속 이후 삼성전자의 대형 인수합병(M&A)이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9조원을 들여 인수한 하만 건을 지금 누가 결정할 수 있겠냐”며 “현재 삼성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미래에 대한 기회 손실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이 오너 구속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총수 공백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이병철 선대회장이 73세이던 1982년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오늘의 신화를 일궜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신경영을 설파하며 벼랑 끝 위기를 돌파했다. 휴대폰이나 바이오산업 등도 오너의 결단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 삼성은 오너십이 없다. 전력질주도 모자랄 판에 모든 게 멈춰 섰다. 글로벌 경쟁력 약화가 예견되는 부분이다. 더 분명한 것은 오너십 부재가 장기화될수록 삼성의 신화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16일은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한 지 19년째 되는 날이다.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정 회장이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1998년 6월16일 83세의 정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 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는데 이는 남북 분단 이후 민간인 최초의 일이었다. 정 회장의 소 떼 방북은 금강산 관광 등 10여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봐 해봤어”라며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자동차·철강·조선·건설 등 모두 불가능하다 여겼던 도전을 성공하게 만든 정 회장이 고령인데도 마지막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는 모습은 작금의 대한민국 기업들이 과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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