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 극단 치닫는 美 정치 양극화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美 절충 없는 정체성 대립에
사회계급 나뉘며 갈등 심화
불편한 견해 토론조차 안 해
다른 의견 포용할 줄 알아야



지난 14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공원 야구장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은 정치적 양극화 현상으로 미국이 갈가리 찢기고 있음을 보여준 섬뜩한 본보기다. 정치학자들은 재건(reconstruction) 시대가 끝난 후 의회가 이처럼 분열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당파성의 깊이와 성격에 충격을 받았다. 양 극단의 한쪽 편에 선 정치인들은 다른 편의 정치인들이 단순히 틀렸거나 토론을 벌일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아예 입을 틀어막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정책 대결이 아니다. 지난 냉전시대에는 몇 가지 쟁점을 둘러싼 좌파와 우파 사이의 간극이 지금보다 훨씬 크게 벌어진 것이 사실이다. 당시 상당수의 좌파 인사들은 전체 산업을 국유화하거나 규제하려 들었다. 이에 비해 우파는 공공연하게 뉴딜정책을 완전히 거둬들이기를 원했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날의 경제적 분리는 상대적으로 별것 아닌 듯 느껴진다.


오늘날의 당파심은 대체로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로널드 잉글하트와 피파 노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간 전통적인 경제 이슈보다 성·인종·민족성과 성적 취향 등과 같은 정체성을 기준으로 자신을 정치적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자아를 규정하는 강력한 결정요인이면서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거의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사회계급을 추가하고 싶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지방 유권자들이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도시 엘리트들과 전면전을 벌인 2016년의 대통령선거는 사회계급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새로운 정치 형태의 위험한 측면은 정체성을 절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핵심적 분리선이 경제라면 차액을 나눌 수 있다. 만일 한쪽 편이 1,000억달러를 원하는 반면 다른 쪽은 단 한 푼도 쓰지 않으려 든다면 둘 사이에는 절충 가능한 숫자가 존재한다. 감세나 복지 정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핵심 쟁점이 문화나 정체성 같은 것이라면 절충은 부도덕하다. 낙태나 동성애자의 권리, 이민정책 등을 떠올려보면 차이점이 쉽게 드러난다. 미국 정치는 점차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중동의 정치를 닮아가고 있다.

오늘날 모든 것이 당파성의 사료가 된다. 최근 유명세를 탄 연극 ‘줄리어스 시저’의 경우를 보라. 센트럴파크에서 공연한 이 연극에서 주인공 시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연극이 대통령 암살을 미화했다고 주장하며 제작비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밝혀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트위터에 연극에 대한 호평을 한 줄 남긴 죄로 야비한 댓글 공격에 시달렸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닮은 시저가 암살당하는 연극이 제작돼 밤마다 공연됐지만 불만을 제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내전과 무정부 상태를 거치면서 시저의 암살이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져온 재앙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암살자들은 패배하고 수모를 당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감독인 오스카 유스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비민주적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려 드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성 우화로 읽혀야 한다.”

정치극은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같이한다. 시저(트럼프)를 호의적으로 해석한 셰익스피어의 세련된 연극은 검열이 아니라 토론의 대상이어야 하며 정신 나간 한 명의 총격범으로 인해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최근 버크넬대에서 한 연설에서 나는 대체로 진보적인 성향의 대학들조차 그들에게 불편한 견해를 침묵시키려 든다고 비난하고 이는 학생은 물론 국가 전체에도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모욕적으로 여겨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제작 지원금 회수 캠페인을 벌이려는 보수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센트럴파크가 그들의 특별한 공간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모두 그들과 다른 모든 종류의 의견과 아이디어에 스스로를 개방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침묵시키고, 내쫓고, 벌주려 드는 대신 상대를 바라보고 귀 기울이며 함께 토론하되, 꼭 그래야 한다면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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