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재위기간이 길다. 1327년 15세 나이로 즉위해 1377년 사망할 때까지 50년 147일 동안 군림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는 역대 5위. 재위기간 1·2위는 여왕이다. 2위가 빅토리아 여왕(1837~1901:63년 216일), 1위는 현재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 65년 135일째인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록은 누구도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위는 조지 3세(1760~1820:59년 96일), 4위는 헨리 3세(1216~1272:56년 29일)다.* 조지 3세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한 국왕, 헨리 3세는 귀족들과 심각한 불화를 겪은 무능하고 욕심 많은 국왕으로 평가받았다. ** 오래 재위한 남자 국왕 가운데 에드워드 3세는 유일한 ‘명군(名君)’으로 손꼽힌다.
2. 에드워드 3세는 동성 애인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했던 부친 에드워드 2세와 달리 신민들의 신망을 받았다. 전쟁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덕이다. 에드워드 3세의 두 번째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백년전쟁(실제 전쟁 기간은 휴전기를 포함해 116년·1337~1453)을 일으켜 초전에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다. 특히 1346년 귀족과 기사로 구성된 중장갑 기병 1만 2,000명과 제노바 석궁병 8,000명을 포함한 4만 프랑스군을 1만 2,000여 병력으로 맞섰던 크레시 전투(1346)에서 압승을 거뒀다. 웨일스 장궁병을 내세운 에드워드 3세는 영국군 250여 명 희생을 프랑스군 1만여 명 전사와 맞바꿨다. 세계 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승이었다.
4. 네 번째, 거액의 몸값을 비롯한 에드워드 3세의 전쟁 자금 조달 방식은 경제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추방했던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조달하기 위해서다. 기대했던 배상금 수입이 예상을 밑돌자 영국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빌린 은행 대출금을 떼어먹었다. 바르디 가문(1353년)과 페루치 가문(1374년)이 이 때문에 파산했다. 찰스 킨들버거(1910~2003) MIT대 교수의 ‘경제강대국 흥망사(World Economic Primacy)’에 따르면 제노바와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주도한 지중해 시대가 에드워드 3세의 차입금 미상환으로 저물었다. 마침 오스만 튀르크의 등장으로 동방무역이 줄어든 상황. 전쟁 대출금까지 떼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력이 약해지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거액의 몸값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5. 에드워드 3세가 남긴 다섯 번째 흔적도 전쟁과 연관이 깊다. 미국의 전쟁사가 존 린은 ‘배틀, 전쟁의 문화사(원제: Battle)’에서 병력과 물자가 달렸던 에드워드 3세의 전략은 군수품과 식량의 현지 조달, 즉 약탈이었다며 ‘기병대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사들이 마상시합으로 승패를 겨루는 시대가 가고 적의 모든 자원을 부수는 근대적 파괴전이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미국의 워 게임 기획자 겸 전쟁사가 제임스 더니건은 다니엘 매티슨과 공저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라:12인의 장군에게 배우는 리더십’에서 에드워드 3세를 ‘LBO의 제왕’이라고 평했다. LBO(Leveraged buyout)란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 기법. 더니건은 에드워드 3세의 약탈과 대출을 현대 기업 인수·합병전의 LBO의 모범으로 여겼다.
6. 여섯 째, 백년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의 승리와 프랑스군의 패배는 두 나라의 근대를 앞당겼다. 제후들이 평시에는 기사 집단을 먹이고 훈련시켜 전시에 국왕에게 바치는 영주 제도의 군사적 효용가치가 사라진 자리를 상비군이 대신했다. 민간의 권리의식도 커졌다. 전쟁과 포로가 된 국왕의 몸값을 대느라 세금 부담이 커진 프랑스 농민들은 ‘신분 평등’을 부르짖으며 자크리 폭동(1358)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3세 사망 4년 뒤에는 영국에서도 와트 테일러 반란이 터졌다. 한때 잉글랜드 전역의 3분의 2를 점유했던 농민 반란군은 런던까지 진입해 국왕을 알현하고 ‘농노제 폐지와 토지 분배, 인두세를 추진한 간신배 척결’을 요구했다.
7. 일반 백성뿐 아니라 귀족과 기사, 부유층의 권리 의식도 자라났다. 에드워드 3세의 일곱 째 영향은 의회주의의 발달. 에드워드 3세 재위 기간 동안 의회가 47차례나 열렸다. 1339년 소집된 의회에서는 귀족원과 평민원으로 나뉘어 오늘날의 양원(상·하원) 제도가 뿌리내렸다. 시민 대표들과 하급 기사들이 합세하면서 힘이 붙은 하원은 공동 청원, 과세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1340년에는 세금 부과에 상원과 하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하원은 청원을 법안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제한적이나마 법률 제정권도 갖게 됐다.
9. 아홉째, 사회적으로 고귀한 자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도 에드워드 3세의 칼레 공방전으로부터 나왔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함락시켰으나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크레시 전투의 승세를 몰아 도시락 까먹듯 접수하겠다던 칼레를 점령하는 데 11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는 영국군 3만 4,000명에 끈질기게 항거한 칼레 시민 8,000여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살의 위기에서 주민 대표들이 매달렸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대신 우리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10. 열 번째, 칼레 함락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주민들을 구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 왕비의 이름은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 부유한 저지대 지역인 에노 지역 프랑스 방계 왕가의 공주였다. 16세에 두 살 위인 에드워드 3세와 결혼해 43세에 이르기까지 27년 동안 8남 5녀, 13남매를 낳았다. 전쟁터에도 같이 다닐 만큼 남다른 금슬을 과시했던 국왕 부부는 ‘영국인의 부모’로 불린다. 자손이 많아 순수 잉글랜드 혈통의 60% 이상이 이들 부부의 자손이라고.****** 바다 건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와 경쟁했던 힐러리 클린턴, 심지어 흑백 혼혈인 전임 대통령 버락 오바마까지 이들 부부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 제임스 1세(1567~1625: 57년 246일)를 재위 기간 역대 4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스코틀랜드 국왕(제임스 5세)으로 재위했던 36년을 합친 기록이다. 제임스 1세의 스코틀랜드 국왕 재위기간까지 합치면 에드워드 3세의 역대 재위 기록은 6위로 밀려난다.
** 헨리 3세는 귀족들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부왕인 존(John)왕 시절부터 그랬다. 사자왕 리처드의 동생, 전승 소설과 영화 ‘로빈 후드’에서 사악한 국왕으로 등장하는 존 왕은 프랑스 내 영국 영토를 대부분 상실해 실지왕(失地王·the landless) 또는 무지왕(無地王)으로 불릴 만큼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싸웠다 하면 지는 전쟁을 위해 존 왕은 세금을 짜냈다. 가렴주구에 반발한 귀족들은 1215년 존 왕을 러니메드 숲으로 불러내 다짐을 받아냈다. ‘자유민에 대해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조항을 비롯한 63개 약속이 담긴 문서가 바로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다.
*** 프랑스는 약속을 지켰을까. 그렇지 않다. 실권을 쥐고 있던 황태자에 의해 몸값 지불이 지연되자 장 2세는 ‘명예가 떨어졌다’며 1364년 제 발로 영국에 건너가 포로를 자처, 1년 뒤 영국에서 만 45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생을 마쳤다. 사람만 좋았던 장 2세는 ‘선량왕(John the Good)’, 아버지의 몸값을 제대로 내지 않았던 그의 아들은 샤를 5세로 즉위한 이후 전황을 우세로 돌리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 ‘현명왕(Charles the Wise)’이라는 별칭을 각각 얻었다.
**** 영국군에 의한 철저한 파괴는 프랑스인들에게 증오의 감정을 심었다. 영국의 외교 정책은 이후에도 줄곧 유럽의 강대국, 즉 프랑스의 독주를 막는 데 집중돼 양국 국민 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양국은 아프리카 분할 정책이 수단에서 정면충돌한 파쇼다 사건(1898)을 계기로 독일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할 때까지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우방으로 지낸 역사는 불과 두 갑자(120년)도 안되는 셈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법이다.
***** 물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표면적인 이유는 왕위 계승권이었다. 후계가 끊어져 4촌이 승계한 프랑스 국왕(필리프 6세)보다 왕위 계승권에서 우선이라고 주장한 에드워드 3세는 물론 그 후대 영국 국왕들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를 약속했다 걸핏하면 번복해 프랑스인들의 미움을 샀다. 영국은 프랑스 왕가가 혈연관계에서 멀어진 독일계 윈저 왕조의 조지 3세 시대까지 습관적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로서는 사실 왕위를 주장할 만 했다. 어머니인 ‘프랑스의 이사벨라(Isabella of France)’가 필리프 4세의 딸이어서, 프랑스가 영국처럼 모계(母系) 승계를 허용하는 나라였다면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다.
프랑스의 이사벨라는 멜 깁슨이 주연한 1995년 개봉작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에도 등장한다. 프랑스의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배역을 맡았는데 영화 속에서 이사벨라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윌리엄 윌리스(멜 깁슨 분)와 정사를 나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사벨라는 윌리스를 처참하게 처형한 시아버지 에드워드 1세가 죽어갈 때 ‘독립전쟁의 선봉장, 그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당신의 왕좌는 그 핏줄이 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내용이 사실이라면 에드워드 3세는 윌리스의 아들이고, ‘잉글랜드인 60%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사의 후손’이 된다. 사실일까. 영화 속의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