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0%에 육박하는 실업률을 낮추려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성을 키워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후보 시절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제1호 공약으로 내걸었고 현재는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강성 노조는 파리 등지로 몰려나와 친기업·친시장 정책에 반대하며 대규모 거리집회를 벌이고 있다.
강성노조가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한국과 프랑스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은 물론 산업별·개별 사업장 노조도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에 대해서는 강력 반발한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다른 점은 정부 입장이다. 프랑스 정부는 노동시장 경직성을 높이는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고 글로벌 추세를 따르려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라는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있는 분위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재 우리나라에는 노동 유연성 및 생산성 제고 담론은 실종됐고 정부의 묵인을 등에 업은 임금인상·고용유지 등 강성 노조들의 구호만 난무하는 상황이다.
양대 노총의 한 관계자는 23일 “정부와 기업이 그동안 규제 완화나 노동시장 유연화를 만병통치약처럼 쓰다 보니 우리나라가 저성장의 늪, 양극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의 우리 사회는 고용의 질을 바꾸자는 게 대세인데 그런 마당에 노동 유연성·생산성 제고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나라 전체 고용 유연성 지수를 보면 전혀 경직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국제 비교를 해봐도 우리나라의 일자리는 안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 고용시장 현실은 이와 다르다.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스위스 유니언뱅크(UBS)가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국가별 노동시장 유연성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139개 조사대상 국가 가운데 8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기술 순위(23위)와 비교해보면 사뭇 대조적이다.
새 정부 들어 강성 노조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와 노동 생산성 향상 논의는 뒤로한 채 임금 인상과 고용 유지 등의 현안에 대해서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파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은 이달 말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으며 금호타이어 등 일부 개별사업장 노조는 이달 초 이미 사실상 고용보장을 위한 부분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연간 3,000만원 수준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며 건설노조는 내국인 노동자 고용대책 마련 등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선 상황이다. 씨티은행 노조도 점포 축소는 절대 불가하다며 일자리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조의 힘이 막강한 현대차 등 완성차 회사를 비롯한 제조업체들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 공장을 짓고 있는 추세다. 현대차 등은 경직된 고용시장의 돌파구로 사내하청 등을 활용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그들 나름대로 노조로 결성해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나친 노동시장 경직성은 국내 일자리의 축소, 국가 산업 경쟁력 약화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현대차 등은 아산 공장을 마지막으로 지난 20여년 간 국내에 공장 짓지 않았다”며 ‘강성 노조가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면 결국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 입장은 이전 정권과 180도로 바뀌었다. 지난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은 수시로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대기업 노조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고용부 장관은 물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노동 유연성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이를 얘기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전문가들은 해고를 쉽게 만드는 유형의 급진적인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어렵다면 임금·근로시간 제도 개선 등을 통한 점진적인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라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영기 한림대 교수는 “노사 갈등과 입법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연공급으로 경직된 임금과 근로시간 제도의 유연성 제고부터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므로 노동계도 이제 이 같은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임지훈·이두형기자 jh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