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학원생 B씨는 매일 아침 지도교수 우편함의 우편물을 수거해 지도교수에게 갖다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연구 관련 우편물일 때도 있지만 사적인 용도의 택배까지 찾아와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B씨는 평소 지도교수의 우편물 수거 외에도 커피 심부름, 보고서 복사 등 각종 잡일을 도맡는다.
연세대 폭발물 사태 후 서울권 다수 대학들이 대학원생 권리장전과 인권구제기구를 도입하겠다고 나섰지만 일회적 조치만으로는 대학원생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규범이 현실에서 충분히 작동하려면 구체적인 행정지침과 인권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서울대학교는 2012년부터 학생인권센터를 운영했지만 대학원생들의 고충이 나날이 늘어 골머리를 앓는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지난 13일 공개한 ‘2016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교육환경 설문조사’를 보면 교수에게 폭언, 욕설 등 인격적으로 모욕을 느끼게 하는 말을 들었다는 학생은 1,222명 중 269명(22%)으로 2년 전 1,488명 중 65명(4.4%)보다 늘었다. 논문 지도를 이유로 대가 제공을 요구 받았다는 학생도 36명(2.9%)으로 2년 전 7명(0.5%)보다 오히려 늘었다.
전국 최초로 권리장전을 도입한 카이스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카이스트 연구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카이스트 대학원생 1,414명 중 271명(19%)은 교수로부터 폭언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 중 56명은 연구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2014년 조사에서 지도교수로부터 폭언을 당한 학생이 1,155명 중 72명(6%)이었던 데 비해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에 대해 현장 일선에서는 “인권구제기구나 권리장전은 설립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운용할 전략을 짜는 게 더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선우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인권규범은 가이드라인이 돼 줄 수 있지만 현장의 사소한 인권침해 상황까지 일일이 예방하지는 못한다”며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을 교원과 학생에게 적시해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얻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논문 표절이나 성폭행 등 권리장전에서 금지하는 행위는 법적으로도 위반행위지만 사적인 부탁이나 행사 참여 강요는 인권침해가 맞는지도 헷갈려 하는 교수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교수들 다수는 자신의 사소한 부탁이 제자에게 강제사항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며 “‘자기 택배는 자기가 가져가자’, ‘교육생에게 시켜서는 안 되는 10가지’ 같은 캠페인이나 빈칸 채우기 이벤트, 글짓기 행사를 열어 전략적으로 인권인식을 퍼뜨리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경주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전문위원도 “외부 시선이 두려워 실태조사를 꺼리는 대학들이 많은데 진상을 파헤치며 자정작용을 거치는 편이 단기적인 조치보다 대학사회에 인권감수성을 학습시키는 효과가 크다”고 덧붙였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발행한 ‘2016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교육환경 조사보고서’에 포함된 캠페인 사례.
인권침해 신고 시 2차 피해를 막을 구체적 대안도 필요하다. 대학원은 일대다(一對多) 교육 구조상 지도교수 한 명이 처벌을 받으면 담당 학생 전체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2년 간 인권센터에서 활동해 온 한영훈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피해자 이외의 학생들이 신고를 못하도록 종용하는 등 각종 압박이 있어 신고율이 매우 낮았다”며 “형법 처벌수위까지 가기 전에 인권센터나 단과대 고충처리위원회가 일상적으로 갈등을 조정해 줄 수 있도록 권한을 확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정욱 동국대학교 전 대학원 학생회장은 “지난해 동국대 소속 교수의 비리 문제를 인권센터에서 다뤘는데 교수들의 비율이 높아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다”며 “일반적으로 인권센터에 교수 비율이 높은데 학생위원 참여를 의무화시켜 합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서울대학교 대학원생 대상 설문조사 결과
주요 인권침해 사항 | 수 |
폭언, 욕설 등 인격적으로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말을 들었다 | 269명 |
행사동원이나 집합 등을 강요당했다 | 333명 |
결혼, 양육 등의 개인 생활이나 가족 생활을 간섭 받았다 | 203명 |
늦은 밤 연락, 출근을 강요받는 등 개인적 자유시간을 침해 받았다 | 384명 |
교수의 개인사정으로 충실한 수업을 받지 못했다 | 390명 |
지도교수로부터 충분한 논문지도를 받지 못했다 | 249명 |
자료=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지난해 대학원생 1,2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함.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