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봉준호가 ‘눈치 안 보고’ 자신만의 고유한 창작물을 만드는 원천은 바로 ‘봉준호’ 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번 영화 ‘옥자’ 역시 ‘봉준호 장르’로 태어난 작품이다. 유일무이하다는 뜻이다. 대중은 물론, 영화인들도 ‘옥자’의 탄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도대체 어떤 흐름의, 어떤 비주얼을 보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미 알려진 일부 소재와 실루엣에 압도될 뿐이었다.
봉준호 감독 /사진=NEW
그리고 지난 5월 19일 제70회 칸국제영화제, 6월 29일 개봉 이후 190개국 전 세계인들은 “역시 봉준호”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 작품 면에서의 주목은 당연한 결과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더 크고 더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례적인 상영 방식 탓도 있다. 국내 영화 최초로 미국 넷플릭스의 투자금액 560억 원을 100% 지원 받은 ‘옥자’는 넷플릭스만의 상영 방식인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영화가 함께 공개돼야 했다. “전통을 깨는 방식”이라는 지적과 함께 프랑스극장협회와 국내 3대 멀티플렉스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수차례에 걸친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그럼에도 넷플릭스와 협업한 이유로 “영화의 스토리가 과감하고 독창적이어서 망설인 영화사들이 많았는데, 넷플릭스가 과감히 투자해줬다. 나의 100% 컨트롤 하에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순수하게 창작자의 관점에서 협업 과정을 밝혔다. 창작에서 만큼은 외골수인 크리에이티브한 기질이 지금의 ‘믿고 보는 봉준호’라는 브랜드를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옥자’는 비밀을 간직하고 태어난 거대한 동물 옥자와 강원도 산골에서 함께 자란 소녀 미자(안서현)의 이야기를 다룬다. 봉준호 감독은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옥자’는 아이와 동물에 대한 호들갑이 많다. 후반부를 더 쇼킹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았는데, 한국에서 12세 관람가가 나와서 의외라 생각했다. 미국, 호주 관객들은 무시무시하다는 반응을 많이 하더라. 한국에서는 동화적이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그 둘의 반응을 섞어서 ‘잔혹동화’라 표현할 수 있겠다.”고 영화를 소개했다.
2006년 영화 ‘괴물’에서 돌연변이 괴물을 CG로 구현해 이전에 없던 비주얼을 선보인 봉준호 감독은 당시의 노하우로 ‘옥자’에서도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냈다. “서울 거리에서 마주친 특이하고 덩치 큰 동물을 본 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2011년부터 동물의 이미지를 고민했고, ‘괴물’에서 호흡을 맞췄던 콘셉트 아티스트 장희철과 함께 돼지, 하마, 코끼리, 매너티 등을 섞은 옥자의 외형을 만들었다. 직접 거쳐 온 100여개의 그래픽 콘셉트를 보자니 첫 단계부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전해졌다.
봉준호 감독 /사진=NEW
“옥자는 억울한 느낌이 있다. 돼지는 사실 억울한 동물이다. 개 중에 가장 똑똑하다는 진돗개보다 돼지의 아이큐가 더 높다고 하더라. 그렇게 똘똘하고 섬세한 동물인데, 우리는 돼지를 보면 순대부터 생각한다. 소세지, 삼겹살 등... ‘돼지’만큼 우리가 음식으로만 떠올리는 동물이 있을까. 소는 밭을 가는 용도로라도 쓰는데. 돼지 입장에서는 ‘사실 나는 되게 똑똑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덩치가 크면 위압적일 수만 있어서 덩치는 크지만 가엾고 억울해 보이는 이미지를 원했다. 그런 뉘앙스를 뿜어낼 수 있는 디자인을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6개월이 넘게 걸렸다.”
“생물체 디자인이 되게 어렵다. 처음 봤을 때부터 믿을 만해야 한다. 그 후에도 복잡하다. 150명 넘게 팀이 붙어서 돈과 시간이 많이 들었다. 영화에서 옥자가 총 300샷 이 나오는데, 1샷 당 전셋집 값의 가격이 나온다. 그래서 감독이 명확한 플랜이 있어야 한다. 그 카드를 손에 쥐고 운영한다. 샷을 낭비해서도 안 되고 정말 신중하게 계획을 잘 짜야한다. 그 경험을 ‘괴물’ 때 이미 했다. 당시 순제작비 110억 원으로 괴물을 만들었는데, 어려운 조건에서 작업했던 게 도움이 됐다.”
이 같은 노력이 묻어나는 것이, ‘옥자’는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와 옥자의 순수한 정서적 교감이 돋보여 몰입감을 준다. 단지 미자의 연기만으로 커버하기엔 벅찬 부분인데, 옥자의 미세한 눈망울의 변화, 입꼬리로 짓는 표정이 ‘동물도 감정을 느끼는 주체’임을 전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은 옥자와 미자의 여정을 보다 다이내믹하고 웅장하게 그리기 위해 글로벌 로케이션을 진행했다. 한국의 강원도 산골 마을부터 서울 도심을 포함한 전국 각지, 미국 뉴욕, 캐나다 밴쿠버까지 1년간의 탐색과 5개월간의 촬영이 이뤄졌다. 덕분에 ‘옥자’는 단순 ‘동물 보호’의 개념을 넘어 ‘자연 주의’로까지 메시지가 읽힌다.
“‘무성한 자연 속에 풀과 나무, 동물과 아이가 있으면 그 곳이 천국과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 그걸 초반부터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옥자야’ 정도를 제외하고 대사도 많지 않다. 과장된 음악이 흘러나올 필요도 없었고, 덤덤하게 자연 속에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끝부분에서는 참혹하게 대비된다. 그 대비를 관객이 체험했으면 한다. ‘자연 주의’ 메시지를 웅변하거나 설파할 필요 없이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로케이션팀이 굉장히 고생했다. 관광객이 다니지 않는 지역에서 촬영을 했는데, 산 속에 장비를 헬리콥터로 이동해 찍기도 했다. 미자네 집은 강원도 정선의 해발 1200미터 지역에 세트로 만들었다. 초반 장면이 중요했다. 마지막과 대비해서 그림과 메시지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벌리고 싶었다. 도살장은 워낙 규모가 커서 처음부터 세트를 지을 수는 없었다. 실제 도살장을 찍을 수도 없었다. 누가 허락하겠는가. 그래서 방금 문 닫은 맥주 공장을 변형 세팅해서 찍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2015년 콜로라도 도살장을 다녀온 적이 있어 비주얼을 기억했는데,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봉준호 감독 /사진=NEW
그렇게 광활한 자연 풍광부터 화려한 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심, 암울하고 위압적인 도살공장까지 세계 규모를 넘나드는 ‘옥자’의 장르는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다. 봉 감독은 “공간을 대신 체험할 수 있도록 촬영에 힘썼다. 그 위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부산 영화의 전당, 파주 명필름 영화센터, 건국대 상영관에 있는 4K버전으로 보시기 바란다. 2K지만 스크린 큰 데서 보셔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관람을 촉구하기도 했다. 폭넓은 시야와 서라운드 사운드는 넷플릭스 스트리밍 동영상으로는 결코 체감할 수 없는 극장만의 특장점이다.
‘옥자’가 공개된 후 많은 평단과 관람객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연상된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동화와 같은 순수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는 전체적인 그림에서 꽤 유사한 궤를 보인다. 이 같은 반응에 봉 감독은 굳이 억지로 부정하거나 꾸밈없이 “미야자키의 영화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내 혈관에 그런 부분이 새겨져있는 것 같다. ‘원령공주’, ‘미래소년 코난’ 등 많은 작품을 봐왔다. 그런데 사실 ‘꼬마 돼지 베이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얼마 전 시드니영화제에서 옥자를 상영했을 때 ‘매드맥스’를 연출한 조지 밀러 감독이 왔다. 조지 밀러가 ‘옥자’를 좋다고 얘기하면서 돼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 분이 ‘꼬마 돼지 베이브 2’를 만들기도 했다. 2편이 과소평가 받았지만, 나는 되게 좋아했다. ‘매드 맥스 2편’도 좋아해서 내가 ‘20번 이상 봤다’고 얘기했더니 정작 조지 밀러 스스로는 ‘I can not remember’라고 하더라. 1983년 작이니까.(웃음)”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까지 주로 은유적인 작품을 선보이다가 ‘설국열차’(2013)와 ‘옥자’에서 직접적인 표현법을 보이는 것 같다고 하자 “모든 게 상대적인 차이다. ‘마더’는 뿌연 안개 속에서 보는 이를 압박한 게 있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직설적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다루는 SF 장르이다 보니 그랬다. 이런 내용과 주제가 2시간짜리의 긴 영화로 다뤄진 것은 처음이지 않느냐. 아마 나 이후로 이 주제를 변주하는 감독이 있다면, 안개 속의 느낌으로 그릴 수 있을 거다. 이 주제를 처음으로 다루는 입장에서 명쾌하게 그리고 싶었다.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도 수백 가지가 나오듯이 얼마든지 변주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옥자’는 칸 영화제에서도, 개봉 직전 국내 3대 멀티플렉스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옥자’에 대해 프랑스 극장협회는 “극장 개봉 이후 3년이 지난 영화라야 넷플릭스와 같은 가입자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가 가능하다”라며 경쟁부문 초청에 반발하고 나섰다. 국내 멀티플렉스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측 역시 넷플릭스와 극장의 동시 개봉을 문제 삼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에 ‘옥자’는 현재 대한극장, 서울극장 등을 포함한 전국 84개 단관 극장, 108개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상태다.
이처럼 번진 논란에도 봉 감독은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소신 있게 얘기했다. “넷플릭스는 음악, 시나리오 등 100%의 모든 권한을 나에게 줬다. 넷플릭스에서 질문한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제이크가 나오는 실험실 장면에서 알폰소가 굳이 안 나와도 되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내가 꼭 찍고 싶었던 부분이라 말하니 바로 알았다고 하더라. 그런 장면은 다른 스튜디오들에서 아예 찍지도 못하게 한다. 실제로 한 스튜디오에 제안했을 때 ‘알폰소 신’, ‘도살장신’을 찍을 건지 계속 물었다. 옥자에 대한 계산이 다 돼 있었는데, 넷플릭스가 유일하게 서포트도 하면서 간섭하지 않는 회사였다. 넷플릭스 덕분에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공교롭게 극장 개봉을 기반으로 하지 않아서 어떻게 설득해서 큰 스크린에서 개봉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야 했다.”
봉준호 감독 /사진=NEW
지금껏 관객들의 시선에 억압되지 않고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며 작품을 내놓은 봉 감독은 “영화 학교에서 Q&A를 받다보면 학생들이 ‘자기검열을 어떻게 하냐’, ‘관객이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걸 만든다. 되게 이기적이 돼야 한다’고 단순무식하게 대답한다. 어떤 장면을 잘못 만들면 관객이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관객’이란 개념이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 것이다. ‘나’도 한 사람의 영화 팬이니까 이기적이 됐으면 하고 당부한다. 그러면 오히려 영화가 간결해진다.”라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유지해올 수 있던 노하우를 밝혔다.
‘플란다스의 개’ ‘괴물’ ‘설국열차’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 자연환경과 인류의 생존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아 온 봉 감독은 단지 ‘메시지를 심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전체적인 맥락과 현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감독 봉준호가 하는 일이다.
“주제라는 과녁이 있고, 스토리를 억지로 맞추려 한 적은 없다. 옥자도 우연히 동물 이미지가 떠오르고서 스토리를 눈덩이처럼 불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만들어졌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그런 과정이었다. 감독들마다 영화 만드는 과정이 다르다. 김지운 감독님은 장르에 깃발을 꽂고 촬영을 시작한다. 메시지를 생각하고 찍는 감독도 있는데, 나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봉준호 장르’라는 말까지 있겠느냐는 반응에 봉준호 감독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내 영화에 ‘봉준호 장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행복하다. 이번 ‘옥자’를 놓고 넷플릭스가 드라마, 스릴러, 어드벤처 중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지 궁금하다.(웃음) 주제와 메시지만 전달하려면 오히려 책과 SNS가 빠른 방법이겠다. 영화는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메시지가 어떻게 보면 장면을 돕는다고도 생각한다. 영화가 나의 상황과 비슷하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옥자’를 보고 ‘돼지고기를 못 먹게 됐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고 사회적인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더 와 닿을 것이다. 메시지도 드라마도 감정의 일부라 생각한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