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대학살의 신'] 두 부부의 아슬아슬한 설전…지긋지긋한 인간의 위선을 꼬집다

폐부를 찌르는 블랙코미디에 폭소
네 중견배우의 빈틈없는 연기 매력

연극 ‘대학살의 신’의 첫 라운드는 고상하다. 그러나 가식적인 미소와 말투도 이들의 위선을 감추지 못한다. /사진제공=신시컴퍼니
17세기 한때 유럽에서 인간의 탐욕을 자극했던 튤립은 역사상 최초의 버블을 만들어낸 주범 치고는 참으로 우아하고 기품있는 모습을 갖췄다. 새하얀 튤립은 더욱 그렇다. 청초한 모습의 흰 튤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누구도 그 꽃말이 ‘실연’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화병 가득 담긴 흰 튤립이 한눈에 들어오는 연극 ‘대학살의 신’ 무대에는 튤립만큼이나 아이러니한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11살짜리 사내 아이들. 알렝(배우 남경주)과 아네트(배우 최정원)의 아들 페르디낭이 미셸(배우 송일국)과 베로니끄(배우 이지하)의 아들 브뤼노의 앞니를 부러뜨리면서 이른바 가해자 부모가 피해자 부모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일 중독의 비열한 변호사 알렝은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클라이언트로부터 오는 전화를 받기 바쁘다. /사진제공=신시컴퍼니
화해와 재발방지 방안을 의논하는 첫 라운드는 우아하다. 뾰족한 송곳을 가식적인 말과 웃음으로 감춘 채 두 부부는 아슬아슬한 설전을 이어간다. 이어지는 라운드에선 “남편을 캐리어 끌듯 끌고 다닌다”며 불평하는 알렝과 “유모차 한 번 끌어본 적 없는 남편”에게 불만 가득한 아네트, 잘 나가는 변호사 알렝과 생활용품 외판원 미셸, 문명사회의 규범과 문명인을 숭상하는 베로니끄와 인간의 본원적 야만성을 믿는 알렝이 연달아 맞붙는다.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심리적 부담을 느껴 거실에 토하고 마는 아네트(배우 최정원)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아네뜨(배우 최정원)의 토사물을 치우는 베로니끄(배우 이지하)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상대를 바꿔가며 팽팽하게 이어지는 이들의 싸움은 한없이 진지한데 지켜보는 관객들은 폐부를 찌르는 블랙 코미디에 폭소할 수밖에 없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시종일관 울리는 휴대폰 전화를 받느라 문제 해결에는 아랑곳 않는 알렝에게 환멸을 느껴 거실에 토하고 마는 아네트에 대해 인간 문명의 위대함과 고상함을 찬양하던 베로니끄는 신경을 쓰기는커녕 아끼던 책에 묻은 토사물만 닦아내느라 바쁘다. 알렝과 아네트에게 대접했던 파이는 아침에 먹고 남은 디저트였으며 거실을 장식했던 새하얀 튤립이 사실은 우아한 가정으로 가장하기 위해 미셸이 부랴부랴 사다 놓은 장식물에 불과했다는 대목에선 벗겨진 가면 속 허위의식이 고개를 든다. 극의 마무리는 군더더기 없다. 술을 마시고 흥분한 아네트가 튤립 다발을 뽑아 바닥에 내던지면서 팽팽하게 당겨졌던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극으로 치닫던 감정도 공중 분해된다.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술에 취한 아네트(배우 최정원)가 튤립 다발을 집어 던지며 소리친다. “다 지긋지긋해. 애나 어른이나 다 똑같아.”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이 작품은 이미 올리비에상, 토니상, 몰리에르상 등을 휩쓴 수작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다. 탄탄한 대본에 완벽한 구성을 자랑하며 연극과 영화 두 가지 버전으로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이란 얘기다. 이런 경우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평소 한 무대에서 보기 힘든 네 중견 배우의 빈틈 없는 연기와 국내 실정에 맞춘 윤색이 어우러지며 본전을 뛰어넘는 완성도와 깊이를 자랑한다. 특히 소극장 연극에 처음 도전한 송일국은 철딱서니 없는 미셸 역을 섬세하면서도 집중력 있게 소화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곳곳에 숨겨진 상징을 발견하는 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극 중 베로니끄가 좋아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강렬하고 원초적인 화풍으로 인간 내면의 극단적인 암울함을 표현했던 20세기 대표 표현주의 화가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그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을 철저히 분해한 도살자였다는 점에서 연극 ‘대학살의 신’과 맞닿아 있다. 7월2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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