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7일 밤 10시 40분, 중국 베이징시 외곽 노구교(루거우차오·盧溝橋).* 몇 발의 총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마침 중일 양국군의 긴장이 고조된 상태였다.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이 중국 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6일부터 노구교 동북쪽 황무지에서 실탄 사격이 포함된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중대장은 급히 병사들을 모았으나 이등병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엉뚱한 보고가 올라갔다. ‘중국군, 노구교에서 소규모 선제 공격, 아군 병사 1명 실종.’
일본군은 실종 병사 수색에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실종 병사는 이미 돌아왔으니까. 설사 때문에 20분간 대열을 이탈해 복귀한 이등병을 포함한 전 중대원들은 두 시간 동안 어둠 속에 헛수고한 셈이다. 중대장은 추궁이 두려워 병사를 찾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상부에 보고했다. 대대장을 거쳐 ‘중국군의 공격과 실종 보고’를 접한 연대장은 중국 측과 교섭하는 동시에 전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요구로 열린 한 밤중의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중국 측은 실종된 일본군 병사 수색에 나섰다.
없는 일본군 실종자를 찾을 리 만무. 일본군은 실종 병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늦게 중국 측에 알리면서 억지를 부렸다. ‘실종 병사가 돌아왔으니, 실종과 총성의 원인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귀측 지역을 수색하겠다’는 일본군의 주장에 중국 측은 ‘총성은 듣지 못했고 실종 원인은 해당 병사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라며 맞섰다. 이 때까지는 의문의 총성과 실종 소동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8일 새벽 4시 50분,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중국군도 대응에 나섰지만 노구교를 빼앗겼다. 사흘간 지속된 노구교 사건(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의 피해는 불분명하다. 양측 사상자가 중국군 80여 명에 일본군 수십 명이 정설인 가운데 중국과 일본, 서구의 기록이 제각각이다.
분명한 사실은 노구교 사건의 후폭풍이 컸다는 점.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 벌어진 정전 교섭에서 일본군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시내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국민당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이 사과하라는 정전 조건을 둘러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은 전선 확대라는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일본은 노구교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공격’이라고 규정하고 조선군과 관동군을 보냈다. 일본 육군 지휘부는 약 6,000여 명인 중국 주둔군에 ‘3개 사단을 증파하면 석 달 안에 중국을 완전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중국도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친일’이라고 공박 당할 만큼 일본에 유화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7월 12일 장제스는 장시성 노산(盧山)에 중국의 주요인사 150여 명을 불러 모아 닷새간 대책을 논의한 끝에 ‘노산 담화’를 발표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전민족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철저히 희생하고 철저히 항전할 뿐이다.’ 일본과 전쟁을 선택한 장제스의 결의는 세계로 퍼졌다. 최근에는 세계 2차대전 발발 시점을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1939년 9월이 아니라, 노구교 사건 발발 시점인 1937년 7월로 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물론 중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주장이다.
일본과 중국이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은 데에는 둘 다 사정이 있다. 먼저 일본은 두 가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만주 지역을 빼앗아 괴뢰 만주국을 세웠지만 욕심에 안 찼다. 화북 지방의 군벌들을 부추겨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킨 이유도 중국 북부만큼은 완전히 장악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잇는 거대 군사 기지를 건설, 소련에 대항하려는 요량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대중 전면전으로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토 요코(加藤 陽子) 도쿄대 교수(일본 근대사)의 저서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에 따르면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일본군의 피습 자작극으로 발단) 이래 감소 일로를 걷고 있는 대중 무역에 불만이 컸다.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던 입장에서 중국을 일본의 경제권으로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중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시장 침탈과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봤다. 마침 시안사건으로 국민당군과 공산군이 싸움을 멈추고 일본의 침탈에 공동 대응할 것이라는 중국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다는 점도 장제스의 대일 전면전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장세스에게는 나름대로 해볼 만하다는 자심도 없지 않았다. 중국군은 이전의 중국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세찬 국방대 교수가 쓴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전략’에 따르면 중일전쟁 직전 중일 양국의 육군 병력 수는 200만 명 대 38만 명. 해군은 120척 총배수량 6.8만t 대 285척 총배수랑 115만t으로 일본이 압도적 우세를 점했다. 공군도 600여 대와 1,600여 대로 차이가 컸다.
병력 수만 많았지 무장과 훈련은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지만 장세스는 내심 독일식 사단 등 증강된 국민당군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고 믿었다. 히틀러의 독일과 군사협력으로 30개 사단을 독일 육군처럼 개편한다는 계획을 완성 못하고 8개 사단만 편제와 장비 보급을 마쳤어도 이전이 중국군 전력보다는 훨씬 강했다. 충분히 보급이 안됐을 뿐이지 개인화기와 경기관총, 박격포의 성능은 오히려 중국군이 일본군을 앞섰다. 독일제 Gew 88 소총을 면허 생산한 한양식 소총과 kar98k의 면허 생산형인 중정식 소총은 일본군의 38식 소총보다 우위였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북벌 과정을 거치며 전투 경험을 쌓은 물론 신형 장비도 갖췄다. 예산 사정이 빠듯한 가운데서도 국방 투자를 늘려 체코제 경기관총과 프랑스제 박격포 등을 자체생산하고 5개 항공기 제조창에서도 국산 항공기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중국군 내부에서조차 일본군 1개 사단의 전투력이 최소한 중국군 4개 사단 이상이라는 내부 평가가 있었지만 과거보다 사기와 실력이 상승한 점은 사실이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게릴라전에 능한 홍군(공산군)까지 국민당군의 제 8로군으로 편입되며 중국군의 전력은 과거보다 강해졌다.
막상 뚜껑을 연 결과는 예상을 절반쯤 빗나갔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군을 압도하며 8월 29일 베이징을, 이튿날 텐진을 점령했다. 하베이 지방도 일본군이 휩쓸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독일식 사단을 비롯한 국방 투자는 8월 중순부터 두 달 간 이어진 상하이 공방전에서 위력을 나타냈다. 일본은 속속 신규 병력을 투입하고 해군 함정의 무차별 함포 사격을 퍼부은 끝에 막대한 인명 손실을 안고 가까스로 상하이에 입성할 수 있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진격이 늦어졌던 분풀이를 무고한 양민에게 풀었다. 남녀노소 30만명을 죽이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학살인 난징 대학살이 전쟁의 광기 속에 일어났다.
일본군은 호언장담한 대로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으나 그 것은 거대한 수렁이었다. 장제스의 말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에게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었다.’ 장기 지구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군은 연인원 410만명을 동원하고도 중국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의 경제 보복이 시작돼 더욱 궁지에 몰렸다. 중국군은 국민당군과 팔로군이 가끔 대승을 거두며 중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북돋았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압박으로 중국을 지원하다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부터는 적극적으로 중국을 도왔다. 미국이 ‘병기 제조창’으로 전세계 연합국에 무기와 군수품, 식량을 지원한 ‘무기대여법’의 혜택도 입었다. 약 484억 달러(비숙련공 임금상승을 기준 삼았을 때 요즘 가치 약 1조 4,600억 달러에 해당) 가운데 영국, 소련, 자유프랑스에 이어 4위인 16억 2,700만 달러(요즘 가지 약 490억 달러) 규모의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다. 국민당 군대의 희생도 컸다. 권성욱 군사 칼럼리스트의 역저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에 따르면 8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국민당군은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만 206명을 잃었다(반면 팔로군은 참모장 1명과 연대장 5명을 잃은 게 전부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는 동안 중국 국민 역시 크나 큰 고통을 당했다.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군 전사자 320만 명, 부상 159만 7,000여 명에 민간인 사상자 및 피난민 1,700만 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으니까.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말이 아니었다. 군수품 최우선 보급 원칙 아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37년 소 두 마리를 살 수 있었던 100위안의 가치가 1939년에는 돼지 한 마리, 1941년 밀가루 한 포대, 1943년에는 닭 한 마리로 줄더니, 1945년에는 계란 두 알, 1947년에는 조개탄 하나, 1949년에는 휴지 한 장으로 떨어졌다.
중국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51개 회원국으로 출범한 국제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4번째의 지분을 인정받으며 상임이사국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이런 희생과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물론 최종적으로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미국이지만, 태평양전쟁이 없다고 치더라도 일본은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중국이 일본군의 절반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판세와 전황이 어떻게 흘렀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중일전쟁의 도화선인 노구교 사건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후 질서를 결정하는 분기점의 하나였던 셈이다.
노구교 사건 발발 80년 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당사자의 위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중국은 세계 2위로 갈수록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 중일전쟁에서 105만 5,000여 명 전사자와 117만 2,200여 명 부상자를 내며 패전했던 일본 역시 되살아났다. 어쩌면 둘은 바뀐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공생 발전을 위해 민족이라는 편협에서 벗어나라’ 강조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72)은 일본의 편협성을 꼬집는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13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탈원전 운동과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격화하던 시기에 국면전환을 꾀하던 일본 정부는 센카쿠열도 국유화를 선언했다. 바로 그날이 2012년 7월 7일이었다. 상대를 일부러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그대로 됐다.” 노구교 사건 75주년에 맞춰 도발했다는 얘기다.
바뀐 것도 있다. 중국의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같아 보인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움의 90%를 맡았다’고 강변하던 중국은 몇 년 전부터 국민당군의 공로를 일부나마 인정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승리와 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자리였던 지난 2015년 전승절 70주년 행사에서는 노병(老兵)들의 퍼레이드에 국민당 출신들을 포함시켰다. 이념을 떠나 중국을 대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중국을 보며 우리를 생각한다. 중일전쟁에 공헌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좌익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애써 잊혀진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그 부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한반도의 시계와 일본인들의 편협성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