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와치]책 권하는 빽빽한 손글씨의 감동..英서점 '아날로그 큐레이션'의 힘

220년전 문 연 해처즈 서점
직원들 서로 다른 글씨체로
코너 곳곳 책 소개글 붙여놔
호기심 자극해 '책의 재발견'
고객들은 믿고 구입하게 돼
아마존 등장에 도산 될뻔했던
英최대 서점 체인 워터스톤스
아날로그 큐레이션으로 부활
국내업계도 인기도서 벗어나
톡톡튀는 큐레이션 기능 강화를

영국 런던의 해처즈서점에서 독자들이 독창적으로 구성된 서가를 둘러보고 있다. /런던=서은영기자
영국 런던의 최고 번화가로 꼽히는 피커딜리 거리에는 지난 1797년에 문을 연 서점 ‘해처즈’가 있다. 국내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너가 이곳에는 없다. 바로 획일의 상징인 베스트셀러 섹션이다. 대신 서점에서 엄선한 책을 손글씨로 쓴 설명과 함께 빼곡하게 꽂아둔 ‘해처즈의 서가’가 존재한다. 서점을 찾는 이라면 반드시 살펴보고 간다는, 아니 서점의 방문목적 그 자체인 곳이 바로 해처즈의 서가다. 해처즈의 시선이 담긴 ‘아날로그식 큐레이션’에 대한 런던 독서인들의 신뢰는 그만큼 높다.

해처즈의 큐레이션을 굳이 아날로그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서가에 꽂힌 책들의 경우 빅데이터나 추천 알고리즘 등 디지털 첨단기술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서점 스태프들은 해처즈를 믿고 사랑하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직접 골라 서가를 정성스럽게 꾸며놓는다. 그러면 독자들은 마치 뜻이 잘 통하는 친구의 서재를 대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해처즈서점의 책꽂이에서 책을 고르게 된다. 심장이 뛰지 않는 디지털은 결코 줄 수 없는 아날로그만의 생동감 넘치는 감동을 해처즈서점이 런던 독서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해처즈서점이 설립 220주년을 맞아 ‘올해 최고의 책’ 선정을 위한 독자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런던=서은영기자
서점에 들어서면 좀 더 많은 책들이 독자들의 시선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해처즈의 전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장르 구분과 도서분류법에 따른 일목요연한 정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스탠딩 서재 사이로 원형 탁자를 놓아 마련한 소형 서가의 책 구분은 조금은 독특하다. 책 속의 구절을 적어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책들을 모아놓거나 ‘흥망성쇠(rise and falls)’ 섹션과 같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인물이나 국가·기업 등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들을 모은 코너, 영국(Great Britain)과 잉글랜드(England), 런던(London) 출신의 작가들만 모아놓은 섹션도 눈에 띄었다. 모든 코너 곳곳에는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직원들이 손수 쓴 책에 대한 소개 글이 붙어 있다. 마치 서점에 들어선 순간부터 독자의 손을 이끌며 책의 재발견을 도와주는 듯하다. 이 같은 특색 있는 큐레이션은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해처즈서점에 간다는 것은 ‘해처즈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각종 디지털 기기가 오프라인의 현실을 대체하는 시대에 이처럼 ‘아날로그식 큐레이션’이 힘을 발휘하는 현상은 신뢰가 한 기업의 사업적 토대가 되는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스티븐 로젠바움은 자신의 저서 ‘큐레이션’에서 “우리는 큐레이션으로 인해 정보의 홍수가 빚어내는 잡음이 사라진 명료함을 가질 수 있다”며 “스스로 선택하고 신뢰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정보에 대한 의심을 걷어내 안정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해처즈의 큐레이션은 오프라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해처즈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면 정기적으로 해처즈가 엄선한 책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픽션과 논픽션 등 장르를 선택할 수 있고 어린이나 여행 분야, 예술가를 위한 연간 구독 서비스 등 특화 서비스도 있다. 소프트커버를 택할 경우 회당 150파운드 안팎, 하드커버는 300파운드 안팎이다.

베스트셀러 위주의 영업 대신 독창적인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해처즈서점의 서가. 책 아래는 직원들이 손글씨로 쓴 책 소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런던=서은영기자
해처즈 못지않게 독특한 매력으로 영국인들의 독서 문화를 고취시키는 곳이 여행 전문 서점 ‘돈트북스’다. 1990년에 설립된 돈트북스는 첼시·홀랜드파크·햄프스테드 등 런던 내 6개 지점을 운영 중인데 특히 본점인 메릴본점은 목조 건물에 에드워디언 양식의 2층 서가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겨 여행자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영국의 대형서점들이 한 권을 사면 한 권을 얹어주는 이른바 ‘1+1(1 get 1 free)’의 공격적 마케팅을 앞세울 때도 돈트북스는 묵묵히 정가판매를 고집했다. 이 서점은 각 지역별로 섹션을 나누고 각종 여행책과 해당 국가 작가가 쓴 수필·픽션은 물론 역사와 정치 관련 서적까지 두루 갖췄는데 그 다양성은 기대 이상이다. 코리아 섹션의 경우 한국과 북한의 주요 가이드북은 물론 펭귄북스에서 펴낸 홍길동전부터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까지 다양한 책들이 소개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중고 가이드북과 지도, 여행 서적 등을 빽빽하게 꽂아둔 2층 공간이다. 수십년 세월의 때가 묻은 가이드북 시리즈나 지도들을 누구나 펼쳐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런던 피커딜리 거리에 있는 해처즈서점 정문 앞에서 한 독자가 안내문을 읽고 있다. /런던=서은영기자
돈트북스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자인 제임스 돈트는 2011년 도산 위기에 빠졌던 영국 최대의 서점 체인 ‘워터스톤스’에 전문경영인으로 영입되며 또 한 번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경기 불황과 온라인 서점의 공격적인 영업에 밀렸던 워터스톤스를 탈바꿈시킨 키워드도 ‘아날로그식 큐레이션’이었다.

마이클 바스카가 쓴 ‘큐레이션’을 보면 돈트는 출판사 직원에게 일정 수수료를 주고 책의 선택을 맡기는 대신 전문인력을 별도로 고용해 책을 사들였고 직원 누구나 책을 선택하고 진열할 권한을 줬다. 이를 통해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매장 직원은 수동적으로 주문을 받는 위치에서 책임감을 가진 큐레이터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워터스톤스는 아마존 킨들 등장 이후 25%의 매출 급락 상황을 극복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아날로그식 큐레이션이 각광받는 현상에 대해 바스카는 ‘명시적·고강도 큐레이션’을 그 비결로 꼽는다. 물론 알고리즘에 의한 정확한 추천 방식에 있어 오프라인 서점들이 아마존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책들에서 연결고리를 찾고 이를 하나의 주제로 독자들에게 제시할 때 더해지는 가치는 아마존의 연관 도서 알고리즘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15년 말 아마존이 미국 시애틀에 오프라인 형태의 서점 ‘아마존북스’를 낸 후로 앞으로 수백 곳에 오프라인 서점을 출점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점 역시 이 같은 사실의 방증이다.

해처즈서점의 아트 섹션. /런던=서은영기자
큐레이션은 원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문가들이 작품을 수집·관리하는 것을 일컬었다. 이 단어는 정보의 홍수 속에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의 큐레이션 개념은 선별과 배치를 통해 시장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가려내는 기술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해처즈에서 큐레이션한 책을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는 구독 서비스 안내문. /런던=서은영기자
국내에서는 소규모 독립서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큐레이션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일종의 ‘북 파머시(book pharmacy)’를 지향하는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 서점’, 문학 전문 서점 ‘고요서사’, 음악 전문 서점 ‘라이너 노트’, 젊은 시인 유희경이 직접 시를 추천해주는 ‘위트 앤 시니컬’ 등 이미 마니아층을 확보한 서점들이 많다.

큐레이션 서점의 경쟁력이 여지없이 발휘된 현장은 지난달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이었다. 전국 각지 동네 서점 20곳이 모인 ‘서점의 시대’ 코너에는 각 서점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책과 굿즈가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사적인 서점 외에도 국내는 물론 해외 도서까지 고양이 관련 책을 총망라한 서점 ‘슈뢰딩거’ 등 20곳의 독립서점을 행사장 메인 공간으로 불러왔다. 음악부터 추리소설·문학·사진집까지 특화된 영역에서 개성 있는 큐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는 이 서점들은 각각 5종의 엄선한 도서와 특색 있는 전시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책의 발견’전에 참여한 50개 출판사들 역시 보유한 모든 책을 들고 나오는 대신 출판사의 색깔을 드러내는 7종의 책을 엄선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행사의 기획과 홍보를 맡았던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이번 행사를 통해 독자들이 서점에 기대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서점이 고수해온 전통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출판사와 서점에는 ‘책을 파는 행위에 대한 자부심(pride)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과제가 남았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유럽 서점을 탐방하고 온 김 대표는 당시 유럽 서점들에서 발견한 아날로그식 큐레이션 기법을 이번 도서전에서 활용했다. 북스피어 부스에는 영국 해처즈서점처럼 직원들이 손수 쓴 손글씨 큐레이션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는데 참가사들이 진행한 비공개 투표에서 ‘가장 창조적으로 서가를 꾸민 부스’로 꼽히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위주가 아니라 독창적으로 꾸며진 해처즈서점의 서가. /런던=서은영기자
반면 국내 대형서점들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와 신간 서적 위주의 마케팅 일변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교보문고 등 일부 대형서점들이 ‘라이프스타일형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며 점포 수를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는데 책보다는 문구·소품류에 중점을 두면서 공간의 중심이 돼야 할 책이 집객 상품으로 전락하고 오히려 큐레이션을 통한 지식의 편집 기능이 동네 책방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서점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전시, 판매하지 못할 바에는 좋은 책을 선별해 팔고 고객들이 조금이라도 머물게 해야 하는데 국내 대형서점은 큐레이션 기능은 물론 다양성 측면에서도 퇴보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홍대에 있는 점포는 인디 문화나 예술 관련 서적들을 총망라한다든지 점포별로 큐레이션 기능을 강화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런던=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