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수요일] 비의 집

박제천 作



아마,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

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

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

아마,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었지

힘을, 주어서도 안 되고…


그저, 가벼이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

그리,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아마,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

문득, 지금은 곁에 없는 병든 아내가

혼자, 눈잣나무 되어 비를 맞는 것처럼 보였어

그만, 나도 비에 젖으며 그렇게

그냥, 가벼이 떨리는 듯한 눈잣나무에 기대어 있었어

낮은 곳에 살면 높아지고, 높은 곳에 살면 낮아진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우리는 한사코 정신의 높은 곳을 지향했지요. ‘눈잣나무’라는 이름 예쁘지만 생활난이 깃들어 있지요. 산마루 오를수록 눈이 무겁고, 바람 거세어 허리를 세우지 못해 ‘누운 잣나무’라 불렸죠. 아뇨, 후회하지 않아요. 낮은 곳에 내려가면 보란 듯 척추 세우고 아름드리로 자랄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한없이 낮아져서 높은 걸요. 평생 향일(向日)의 노동으로 목 빼고 발돋움하느라 지친 당신도 낮게 비탈에 기대어 봐요. 기댄다는 것은 믿는다는 거죠. 어쩌면 기대는 것이 받드는 것인지도 몰라요.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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