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업체들은 이를 대량 납품의 기회로 여겼다. 미국이 2차 대전에 본격 참전하기 전이었으나 연합군을 위한 병기창 역할을 맡아가던 상황. 적어도 수만 대 이상의 발주가 예상됐다. 정작 입찰 조건에 맞춰 기한 안에 시제품을 선보인 회사는 딱 한 곳. 아메리칸 밴탐사 뿐이었다. 미 육군의 수송 관련 예비역 장교들을 채용하고 있었기에 군의 요구성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미군은 두 가지 이유에서 ‘경 정찰 차량’ 확보에 나섰다. 첫째는 독일군이 운용한 차량의 성능에 놀랐기 때문. 1차대전 패전국으로 전차 개발이 금지됐던 독일이 경전차 대용으로 개발한 사륜구동 차량(메르세데스 벤츠 G-wagon)의 기동성은 미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미 육군이 정찰용으로 운용하던 오토바이 또는 포드 T형 모델의 개량형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났다. 새로운 차량 개발에 나선 두 번째 이유는 원활한 보급. 수송선이나 수송기에 적재해 연합국에 보내려면 가볍고 직사각형 형태인 차량이 필요했다.
최종 계약은 윌리스 오버랜드사의 몫으로 떨어졌다. 최초 입찰 공고를 낸 지 1년 만에 성사된 최종 계약에서 육군성은 윌리스사가 제작을 맡되 밴탐사와 포드사의 기술 지원을 받도록 조정했다. 특히 윌리스사의 생산시설이 부족한 점을 감안, 포드사에도 생산 물량을 안겨줬다. 윌리스사는 본격 납품이 시작된 1942년부터 윌리스 MB라는 명칭으로 종전까지 36만 1,339대를 제작, 납품했다. 포드사 역시 27만 7,896대를 국방성에 넘겼다. 미국 자동차회사들이 제작한 경 정찰 차량은 수륙양용형 차량 등 파생형을 포함해 66만 703대에 이른다.
병사들은 얼마 안 지나 이 차량을 ‘지프(Jeep)’라고 불렀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세 가지 설이 있다. 범
미군의 한 장성이 ‘지프는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세계사를 이동시켰다’고 말했다던가. 지프 생산량의 약 15%는 영국과 소련 등 미국의 우방국들에 제공됐다, 영국이 자랑하는 랜드로버도 지프의 영향으로 개발된 것이다. 소련의 GAZ-64·67도 마찬가지다. 지프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깊다. 한국전쟁에서 대량으로 쓰인 것은 물론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도 미군이 버린 지프의 부품과 휘발유 깡통을 두들겨 펴서 만든 자동차다. 국산 차의 생산이 미미한 가운데 거화자동차(쌍용자동차의 전신)가 미국으로부터 면허를 받아 국내에서도 생산했다. 물론 초기의 지프와 다른 모델이지만 국산 검은 지프는 한때 관용차의 상징이었다. 국내업체의 리비아에 대한 수출이 발각돼 국내에서는 ‘지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국내 SUV(sport utility vehicle)는 지프의 후손 격이다.
군용차로서 지프도 생명을 다했을까. 그렇지 않다. 다시금 조명받는 분위기다. 미군은 지프보다 크고 무거우며 방탄 성능이 뛰어난 험비(고기능다목적차량)와 L-ATV(합동경량전술차량)의 시대를 넘어 일부 부대는 지프처럼 가벼운 차량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다. 지프의 중량은 기본형이 약 1t. 험비는 2.4~2.9t으로 보다 무겁다. L-ATV의 무게는 6.4t에 이른다. 말이 경량이지 경 장갑차 수준이다. 무게가 증가해 방호력은 높아졌으나 문제는 기동성. 수송기에 적재하거나 헬기에 매달아 운송하기 어려워졌다. 덩치가 커 거친 산악 지형에서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미군 특수부대 일부는 말이나 낙타를 험비의 대용품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