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인보사' 국내 판매허가] 가보지 않은 길 뚜벅뚜벅…빛 발한 이웅열 '忍苦의 19년'

성공 가능성 0.0001%에도
1998년11월3일 개발 시작
금융위기 등 난관 많았지만
바이오 투자는 멈추지 않아
"인보사는 넷째 아이" 각별
끝없는 열정으로 목표 달성

이웅열 코오롱 회장
지난 4월 인보사 양산을 앞두고 생산거점인 코오롱생명과학(102940) 충주공장을 찾은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임직원들과의 토크콘서트에서 칠판에 ‘981103’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그가 평생 잊지 못하는 1998년 11월3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계 최초의 퇴행성관절염 세포유전자치료제인 인보사 개발이 아예 시작조차 될 수 없었을 뻔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인보사 사업 검토 결과 보고서를 받아본 이 회장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내용을 보고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바이오 불모지인 한국의 기업이 유전자치료제를 개발한다는 시도 자체가 생소한데다 미국 등 바이오 선도국의 높은 벽을 뚫고 시장성을 확보하는 일은 그야말로 ‘가보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룹 안팎에서 인보사 투자를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결국 이 회장은 “성공 가능성이 0.00001%라고 할지라도 그룹의 미래를 생각할 때 주저할 수 없다”며 과감하게 실행에 나섰다.


이날부터 인고의 19년이 시작됐다. 1996년 부친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고작 2년이 지난 상황으로 이 회장은 외환위기의 풍파를 온몸으로 떠안았다. 당시 코오롱그룹의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는 뼈아픈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도 이 회장은 바이오 분야에 대해서는 과감한 투자를 이어나갔다. 1999년 미국에 바이오 사업을 위한 법인 ‘티슈진’을 설립한 데 이어 2000년 ‘티슈진 아시아’라는 바이오제약 회사를 추가해 본격적으로 인보사 개발에 나섰다. 2001년부터 관련 특허들을 취득함과 동시에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임상을 진행하는 등 뚝심 있게 인보사 개발을 이어왔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등 수차례의 난관에 봉착했지만 그때마다 이 회장은 임직원을 독려했다.

한번은 국내 임상을 진행하기 위해 임상 치료제를 병원까지 옮겨야 했는데 국내에서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업체가 없어 직원들과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 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아침 회의에서 직원들을 직접 챙기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19년간 연구진과 수시로 연락하면서 개발 과정을 챙겼고 모든 사업에서 인보사 개발은 늘 1순위였다. 이 회장은 충주공장 임직원들에게 “내 인생의 3분의 1을 투자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인보사의 성공과 코오롱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함께할 각오가 돼 있다”며 “계획대로 순조롭게 인보사가 출시돼 퇴행성관절염 환자들의 고통을 하루빨리 덜어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1남 2녀를 둔 이 회장은 인보사를 ‘내 넷째 아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하게 여긴다. 또 그는 인보사가 가히 ‘스마트폰 혁명’에 비견될 정도로 고령화 시대에 우리 삶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4억명에 달하는 퇴행성관절염 환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인보사가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혁신 아이템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이 회장은 “바이오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니 두렵기도 하고 어려움도 많았다”며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찾았고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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