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흑백논리의 시대…이야기는 전투력 갖춰야"

“말을 돌멩이처럼 다루며 상대에게 던져대는 흑백논리의 시대, 이야기는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력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7년만에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로 돌아온 무라카미 하루키는 출판사 문학동네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야기는 이성이나 선악의 개념마저 초월하고 동시에 시간과 공간,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선량한 힘’을 지닌 것”이라며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상실감에 사로잡힌 남자 주인공 ‘나’에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음악까지 ‘하루키 스타일’을 집대성한 이번 작품에서 하루키는 ‘난징 대학살’을 다루며 일본 우익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전작들과 같은 듯 다른 이번 작품의 특징은 그가 다루고 있는 세계관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평론가들의 표현대로 ‘세계와 줄다리기 하듯’ 그의 이야기 세계는 더욱 팽팽하고 촘촘해졌다. 일본 열도는 물론 국내에서도 ‘기사단장 죽이기’는 제작부수 40만부를 넘어서며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된 예약판매분을 포함해 교보문고에서만 2만부가 판매됐고 대부분의 온·오프라인 서점들이 전작 대비 30% 신장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다음은 서면으로 진행된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일문일답. 인터뷰 번역은 이번 소설을 옮긴 홍은주 씨가 맡았다.

▲데뷔한 지 40년이 돼 간다. 지금까지 하루키 문학세계를 되돌아본다면.

-“첫 소설을 썼을 때가 29세였는데 지금은 68세가 됐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스물아홉 살 때는 ‘소설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순여덟 살이 되고 보니 ‘남은 인생에서 소설을 몇 편이나 더 쓸 수 있을까’ 생각이 절로 든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커다란 차이다. 대신 그만큼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작품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즐긴다는 점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 글 쓰는 일은 변함없이 즐겁다. 마치 악기를 자유로이 연주하는 것처럼.”

▲이번 소설 구상부터 탈고까지 얼마나 걸렸나. 구상하게 된 계기, 구상의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경험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대략 1년 반이 걸렸다. 소설을 쓰는 동안, 기분전환으로 번역을 조금 한 것 말고는 거의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구상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뿐이다. 글이 ‘써진다’ 싶으면 집필을 시작하고, 매일 계속해서 써나가고, 다 쓸 때까지 쉬지 않았다. 자유로운 게 가장 중요하다. 나의 경우 구상 같은 것은 대체로 방해가 될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품 속 화자인 ‘나’도 ‘믿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작가로서 하루키는 스스로를 믿는 힘이 주인공 ‘나’처럼 단단했는지, 아니면 멘시키처럼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려’ 했는지 궁금하다.


-“일상생활에서는 내 의견이나 신념을 꽤 확실히 지니는 편이다. 그러나(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런 의견이나 신념을 한순간에 무화시켜버리는, 나 자신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흐름 같은 것이다. 그런 힘을 정면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그런 힘에 순순히 몸을 맡기지 못한다면 소설을 쓸 수 없다.”

▲이번 작품 출간 이후 일본 극우파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 평행선을 그리는 역사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 견해다. 그러나 현재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순수한 흑이냐 백이냐’ 하는 원리로 판단이 이루어지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말이 딱딱하게 굳어 죽어버린다. 사람들은 말을 마치 돌멩이처럼 다루며 상대에게 던져댄다. 이것은 매우 슬프기도 하거니와 위험천만한 일이다. 소설(이야기)은 그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소설이 일종의 (좋은 의미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때가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 한번 말을 소생시켜야 한다. 말을 따뜻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양식(decency)’과 ‘상식(common sense)’이 요구된다.”

▲한국에선 ‘세월호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표되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동일본 대지진이 다뤄지기도 하는데. 재난 이후 문학 그리고 문학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크고 깊은 집단적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가 유효하게 표현하고, 나아가 치유할 수 있을까. 이건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여러 차례 시도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으로서는 대부분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것은 ‘어떤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쓰인 소설은 대부분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진 중대한 과제다. 목적을 품되 목적을 능가하는(혹은 지워버리는) 것.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이런 시도에 꼭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한다.”

▲소설이나 문학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야기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다.

-“내 정의에 따르면 이야기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몸속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넘쳐나는 것이다. 의미나 정의, 무슨무슨 주의(主義) 같은 것을 아득하게 넘어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선악의 개념마저 초월하기도 한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선량한 힘’을 지닌 것이다. 그런 힘을 지니지 못한 소설은 아마 독자를 끌어당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의 힘을 생생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뛰어난 능력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그런 일을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나름대로 노력을 거듭해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생각이다.”

▲많은 한국 독자들이 하루키를 만나고 싶어한다.

-“언젠가 그런 기회가 생기면 좋겠지만, 사실 나는 공적인 행사를 썩 좋아하지 않고 미디어에 출연하는 일도 거의 없기에 아무래도 결국 이런 초대를 사양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 독자에게는 늘 각별한 고마움을 느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 책을 변함없이 열심히 읽어주셨다. 이번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도 즐겁게 읽어주시면 정말 기쁠 것이다.”

/정리=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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