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에서 '민초의 힘' 느낄수 있어…정치인들 꼭 봤으면"

뮤지컬 '아리랑' 연출 고선웅

뮤지컬 ‘아리랑’의 연출 고선웅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아리랑을 연출한다는 건 제게 일생일대 영광이에요. 재연만 할게 아니라 100년, 200년 이어지는 뮤지컬이 돼야죠. 400년도 더 된 셰익스피어 공연이 지금도 올라가는 것처럼 이 공연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 이야기를 타당하게 만드는 게 우리 몫이죠. 초연 당시 함께 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다시 와준 것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일 겁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신시컴퍼니가 기획·제작했던 창작 뮤지컬 ‘아리랑’의 재연을 앞두고 19일 서울 종로 5가 연습실에서 만난 고선웅 연출. 공연계의 블루칩, 비틀기의 달인, 국가대표 연출까지 그를 수식하는 말은 화려하지만 조정래의 ‘아리랑’을 고선웅표 ‘아리랑’으로, 무대화하는데 따른 중압감은 작지 않아 보였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 내내 “이 작품은 잘 돼야 한다”는 말을 열 번은 더 했다.

뮤지컬 ‘아리랑’의 연출 고선웅 /사진제공=신시컴퍼니
광복 70주년의 아리랑이라는 상징성을 안고 만들어진 공연이지만 그는 “오히려 지금에서야 때를 만났다”고 했다. “2년 전만 해도 국정농단 사태는 안 드러났잖아요. 국민의 힘, 촛불의 힘,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민초의 힘을 느낀 지금은 국민 개개인의 눈높이가 과거와는 달라졌어요. 일제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지금 세상 모든 게 당시를 버텨준 민초들 덕분이라는 거, 민초의 힘으로 우리가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이 작품 보고 나면 느낄 수 있거든요. 막이 내리고 나면 2년 전보다 더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올 거예요.” 그는 정치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으론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꼭 봤으면 한다”고 했다.


공연 만드는 일을 ‘집 짓기’에 비유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리모델링은 확실히 했다.” 다만 초연 당시 LG아트센터에서 이번에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으로 무대와 객석 규모를 2배 가량 키운 탓에 손 볼게 많아졌다. 물론 바뀐 건 규모만이 아니다. 12권 분량에 달하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2시간 남짓 공연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압축됐거나 불필요하게 더해진 군더더기를 세밀하게 다듬었다. 이 과정에서 무대에 상징성을 더하는 대신 주의를 산만하게 했던 LED 영상은 과감하게 뺐다.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이육사 ‘절정’, 김수영 ‘풀이 눕는다’ 등 민족 시인의 시를 더하는 방식으로, 초연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던 서정적인 음악은 모두 편곡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 이달 초 선보인 쇼케이스에서 음악이 한층 더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건드리지 않은 것도 있다. 속으론 슬프지만 겉으론 슬프지 않게,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애이불비’. 고선웅이 늘 강조했던 이 작품의 연출의도다.

뮤지컬 ‘아리랑’의 연출 고선웅 /사진제공=신시컴퍼니
독립운동가 송수익 역의 배우 안재욱·서범석, 일제 앞잡이 양치성 역의 김우형, 수국 역의 윤공주, 감골댁 역의 김성녀 등 초연 당시 배우들 대부분이 재연무대에 다시 선다. 한 달 전 시작된 대본 리딩부터 배우들은 2년간 품어왔던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고선웅은 “민초들이 이 나라의 주역이듯 이 작품 역시 한 사람의 영웅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인 작품이라는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차갑고 냉소적인 첫인상과 달리 고선웅은 착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한다느니 연극은 사랑이라느니, 작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책무가 있다느니 하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들을 자주 한다. 그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에서도 묻어난다. 선악 구도가 명확한 일제강점기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고선웅이 가진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이 ‘아리랑’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생각이 든 건 40대 중반부터란다. “맛있는 음식점을 다녀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것과 같아요. 음식점까지 끌고 가진 못하더라도 얘기는 해줄 수 있잖아요. 이렇게 좋은 게 있는데 나만 알 수는 없는 거지. 연극도 그래야 해요. 관객들에게 좋은 걸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겁니다.”

뮤지컬 ‘아리랑’의 연출 고선웅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수년째 그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매년 5~6작품 이상을 쓰거나 연출했다. 올해도 창극, 연극, 뮤지컬을 넘나들며 이미 세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그가 연출하는 뮤지컬 아리랑과 연극 라빠르트망, 연말에는 극본을 맡은 뮤지컬 광화문연가가 대기 중이다. 내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패럴림픽 개·폐막식 연출까지 맡았다. 올 한 해 스케줄만 봐도 대단한 멀티태스킹 능력을 가졌을 법하다. “후배들에게 늘 얘기해요. 폴더를 여러 개 갖되 한번에 다 열면 안 된다고. 뮤지컬 아리랑 연습할 땐 아리랑 폴더만 열어야지. 근데 집에 가서 잠자리에 누우면 모든 폴더가 다 열려요. 잠을 잘 수가 없지. 그래도 아직은 살만하네요. 작품, 무대, 배우, 관객 모두를 사랑하니까.” 25일~9월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