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김모(27)씨는 올해 50대 후반의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된다.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던 아버지는 정년 퇴직 후에는 집에만 있으려 한다. 낮에는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가 밤에는 TV와 소주를 한동안 옆에 끼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든다. 힘없이 있다가 느닷없이 잔소리를 퍼붓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많다. 한번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자고 권유했다가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역성을 내는 바람에 사이만 나빠졌다.
쉰 살 아재들의 ‘속 앓이’가 계속되고 있다. 우울증 탓이다. 은퇴 시기는 다가오는데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줄어들지 않고, 가족과의 소통 부재로 외로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이들 세대는 평생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보거나 일이나 직장 이외의 방법으로 자아를 실현해 본 경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 앞에서는 강한 척 하지만 의외로 정서적으로 취약한 세대로 분류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연령별·성별 우울증 진료 인원’을 조사한 결과 50대 우울증 남성 환자의 수는 전체 연령대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증가 추세도 꾸준하다. 2014년 3만6,102명이던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 수는 지난해 3만9,463명으로 9.3% 증가했다. 지난 2007년(2만6,800명)과 비교하면 32%나 증가했다.
늘어나는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 추이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우울함을 정신적 나약함으로 인식해 우울증을 혼자서도 극복할 수 있는 질병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50대를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인식개선이 뒷받침돼야 효과를 거둘 있다는 얘기다.◇ “삼식이어도 가장이다” 부양 부담은 여전= 은퇴를 기점으로 남성은 가정을 책임지는 슈퍼맨에서 ‘삼식이(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사람)’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들 중년 남성은 심리적으로 가정에서 찬밥 신세가 됐다고 느끼면서도 현실적으로 부양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14~2015년 보험개발원 은퇴시장 설문조사 통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예상 퇴직급여는 1억52만원이었지만 은퇴 후 예상 자녀 부양비(교육비+결혼비)는 1억5,219만원에 이르렀다. 은퇴 후 자신의 노후 자금은 제외하더라도 자녀를 가르치고 결혼시키는 데만 5,000만원 가량이 더 필요하다고 내다본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50대는 가장 큰 걱정거리로 건강(32.0%), 자녀교육(9.6%), 일자리(16.3%), 노후생활(24.7%), 주거비(6.7%), 부채상환(5.1%), 부모부양(5.6%) 등을 꼽았다. 자신의 일자리 유지와 노후생활을 장담하지 못하는 가운데 높은 주거비, 자녀교육과 부모부양 등을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들이 취업난으로 갈수록 독립이 늦어지는 20대의 부모 세대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50대의 걱정거리 1순위
이처럼 은퇴를 전후로 노후 대책 우려와 가족 부양 부담이 겹치는 가운데 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대화 통로가 막힐 경우 쉽게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2011년 한국보건사회학회의 학술지인 ‘보건과 사회과학’ 제 29집에 따르면, 가족 스트레스가 높은 중년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4배 이상 높았다.실제 부부갈등 때문에 상담센터를 방문한 중년 남성이 우울증 의심진단을 받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두은미 헬로스마일 상담센터원장은 “아내가 자신에게 소홀하다는 이유로 상담을 받다 펑펑 우는 중년 남성들이 꽤 있다”며 “은퇴 시기를 앞두고 경쟁에서 밀림과 동시에 가정에서는 소외 받는 중년 남성들의 우울감은 생각보다 깊다”고 말했다.
◇ ‘남자답게’ 참고 참다가 탈난 아재들= 50대 남성은 낡은 ‘성역할’ 관념에 붙잡혀 우울증을 방치하다가 병을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남자는 정신적으로 나약함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울해서 병원을 간다’는 행위 자체가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불면증이나 두통, 소화불량 등 신체적 이상이 발생한 이후에야 병원을 찾는다. 원인을 몰라 내과, 가정의학과 등 1차 의료기관을 전전하면서 치료는 더 늦어진다.
영화 <비버>의 한 장면. 주인공 월터 블랙은 무기력한 남편이자 부끄러운 아버지, 무능한 사장이다.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출처=네이버 영화
이 때문에 50대 남성들의 우울증 환자 수는 관련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병철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다른 질병으로 입원한 50대 남성 환자들이 불면증과 답답함을 호소해 진료를 해보면 우울증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일하다가 잔소리가 많아지고 우울해지는 현상을 우울증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고 설명했다.문제는 우울증을 방치할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2016년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조기 치료를 놓친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는 여성보다 자살 가능성이 더 높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우울감과 불안감 등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자 수에서 남성(10만 명 당 38.4명)이 여성(10만 명 당 16.1명)의 2.4배나 높았다.
◇“감추는 건 이제 그만” 인식 개선해야= 정부도 우울증 환자 수가 가장 많은 50대를 위해 여러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부터 생애전환기 검사에 우울증 검진을 함께 시행한다. 서울시도 지난해부터 50대 마음검진 사업을 통해 정신건강검진과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의도만큼 효과가 크지 않은 실정이다. 우울증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인데다 50대 남성들 스스로가 치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 같은 우울증 치료 프로그램을 장기적으로 더 보완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홍보나 사전 예방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50대 남성들이 가족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지지를 얻어내려는 노력도 필수다.
김문근 대구대 복지학과 교수는 “정부의 정신건강정책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치료에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은 정신건강 문제를 보는 일반 시민들의 인식과 연결돼 있다”며 “단순히 우울증이 발병한 사람들만 선별해 치료하는 정책은 사후적 개입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방과 정신건강 증진 서비스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성윤지인턴기자 yoonji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