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까지 공적자금으로 빌려주겠다는데…

민간서 운영하던 '장발장 은행'
서민금융진흥원 통해 사업 추진
생계형 범죄자 회생 기회 확대
일각선 도덕적 해이 조장 우려도

정부가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장발장은행 사업’을 공적기관에서 수행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장발장은행은 민간이 기부금을 통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서민에게 벌금을 융자해주는데 공적자금을 투입할 경우 도덕적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21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만든 5개년 국정운영계획의 ‘서민 재산형성 및 금융지원 강화’ 방안에 장발장은행 확대 개편안을 확정했다.

국정기획위는 “서민의 가정경제 파탄 방지를 위해 민영 장발장은행 운용 비용 및 개인회생·파산신청 시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장발장은행은 시민단체와 인권연대가 주축이 돼 2015년 문을 연 ‘생계형 범죄자’를 구제하기 위한 은행이다. 경범죄를 저질러 벌금을 받았는데 낼 돈이 없어 노역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취지다. 현행법상 벌금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안에 현금으로 한번에 내야 한다. 미납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의 노역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이 벌금 대신 감옥살이를 하는 사례가 많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벌금을 못 내 노역장에 유치된 건수는 지난해만 4만2,668건에 달한다. 장발장은행은 자발적인 기부로 모인 돈으로 이자나 담보를 받지 않고 최대 300만원(6개월 거치, 1년간 균등상환)까지 벌금을 낼 수 있게 빌려준다. 지원 대상은 벌금을 받은 후 생계가 곤란해 벌금을 내지 못할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미납으로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등 차상위계층이다.

정부는 장발장은행을 서민금융진흥원으로 이관해 사업을 개편할 계획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은 금융권의 휴면계좌에 담긴 돈을 공적자금으로 활용하는 정부 유관기관이다. 문제는 벌금까지 공적자금을 통해 무이자로 융자한다는 점이다. 현재도 벌금은 △기초생활보장법상 기초생활수급권자 △의료급여법상 의료급여수급권자 △한부모가족지원법상 보호대상자 △자활사업참여자 △장애인 △본인 외에는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 △불의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 등은 검사의 허가를 받아 분할 납부와 납부 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발장은행의 지원 사례를 보면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운전실수로 전신주를 들이받거나 압류 딱지를 떼어냈다는 이유로 벌금을 받은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하지만 명품 대여 업체에서 가방을 빌려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횡령하거나 직장 동료의 명의를 도용해 인터넷에 가입한 사문서 위조 행위 등 인지 범죄를 저질러 벌금을 받은 경우도 있다.

정부는 더 나아가 장발장은행을 확대 개편하면서 생계형 범죄에 대한 지원 기준과 범위도 늘릴 예정이다. 범죄인지 알고 저질렀지만 생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공적자금을 통해 벌금을 융자 받는 경우가 확대될 수 있다. 생계형 화물·운송업자들이 경미한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와 수백만원의 벌금을 받은 후 장발장은행을 통해 융자를 신청할 수도 있다.

장발장은행은 벌금조차 내지 못할 사람들에게 융자되기 때문에 회수율도 낮다. 출범 이후 이달 19일까지 장발장은행은 500명에서 9억3,823만원을 대출했다. 이 가운데 249명이 대출금을 상환(전액 상환 70명)하고 있고 상환금액은 2억1,551만원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벌금을 공적자금으로 빌려준다면 회수가 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해 엄격한 지원 기준을 두고 정말 억울한 사람만 융자를 받게 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되레 도덕적해이만 조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경우·빈난새기자 bluesquare@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