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의 시작, 몬카다 병영 습격



1953년 7월 26일 새벽 5시 15분, 쿠바 동남부 산디에고 드 쿠바. 137명의 반군이 지역 방송국과 병원을 접수했다. 새벽 6시, 기세가 오른 반군은 몬카다 병영에 총격을 퍼부었다. 반군의 기세는 바로 꺾였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육상기지인 몬카다 병영에서 쏟아져 나온 1,000명의 바티스타군에 눌려 산으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정부군의 철저한 수색 과 사살 작전으로 51명이 체포되고 61명이 사살됐다. 온전히 도망친 반군은 25명에 불과했으나 쿠바 역사는 이날을 길이 기억한다. 쿠바 혁명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주모자인 27세의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도 바로 잡혔다. 76일간 독방 수감 끝에 진행된 비밀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 받은 카스트로는 의연한 모습으로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여론에 힘입어 복역 20개월 만에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 ‘7월 26일 운동’을 조직해 병사와 무기를 모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이며 혁명을 꿈꾸는 청년 체 게바라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카스트로는 1956년 말 정원 12인승 요트 ‘그란마호’에 83명의 반군을 태우고 쿠바에 상륙, 본격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정부군의 진압으로 병력이 한때 14명으로 줄었으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군은 2년 뒤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끝내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겁도 없이 거대한 병영을 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군은 병사들도 반란에 동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몬카다 기지에서 무기를 확보해 민중들에게 나눠주면 본격적인 대정부 무력 투쟁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 구조적으로 쿠바는 어떤 형태든 변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7년에 발표한 소설 ‘소유와 무소유’에 묘사된 수도 아바나의 모습. ‘동이 틀 무렵의 아바나를 본 적이 있는가? 거지들이 건물 벽에 기댄 채로 아직도 잠자고 있고, 술집으로 얼음을 실어 나르는 차들조차 보이지 않는 그때를 본 적이 있는가?’


헤밍웨이가 그린 ‘해가 떠도 반응하지 않는 무기력한 도시, 절망한 거리의 거지 떼’들은 역사와 산업구조의 산물이었다.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항시적 실업 상태였다. 스페인에서 독립하는 순간부터 쿠바는 미국에 의해 손발이 묶였다.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1898년)의 결과로 독립했지만 헌법에는 ‘플랫 수정조항(Platt Amendment)’이라는 독소가 들어갔다. ‘쿠바의 독립을 보전하고, 생명·재산·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불평등 조항은 1934년까지 존속하며 쿠바를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었다.

미국의 비호 속에 1934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17년간 권력을 독점해온 바티스타 정권은 각종 이권을 미국에 넘겼다. 미국계 자본이 소유한 설탕 공장의 비중은 1906년 15%에서 몬카다 병영습격 직전에는 85%로 늘어났다. 공공사업의 80%, 전화·전기 분야의 92%, 공공철도의 절반, 사탕수수농장의 60%를 미국 자본이 소유했다. 쿠바의 대지주와 자본가, 고위 장성들도 미국인처럼 변해갔다. 아바나 또는 미국의 뉴욕에 살며 요트와 카지노, 특권층끼리 사교를 즐겼다. 미국 자본 뿐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도 쿠바로 몰려들었다. 향락을 위해서다. 미국인들을 위한 매춘업소가 쿠바 곳곳에 들어섰다. 역대 독재정권은 미국 마피아들에게 카지노를 허용하며 수익금을 나눠 가졌다.

대학생들과 일부 성직자, 지식인 그룹이 ‘미국의 경제적 정신적 창녀’로 전락해 미래가 없는 현실을 타파하려 나섰다.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시작된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이 성공했을 초기, 미국 언론들까지 반겼다. 그만큼 미래와 희망이 없었다. 정작 쿠바는 혁명 이후 더 큰 어려움에 빠졌다. 독재자 바티스타는 30억 달러의 재산을 챙겨 도미니카로 도망쳤다. 돈줄이 마른 쿠바 혁명 정부는 사탕수수 농장의 외국인 소유 금지를 비롯한 토지 개혁과 경제 재건에 나섰으나 바로 철퇴를 맞았다.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외국 자본과 쿠바 특권층은 ‘카스트로 정권은 빨갱이’라고 몰아 부쳤다.

자본의 반격에 봉착한 카스트로의 쿠바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침 소련이 사탕수수와 원당을 국제 시세보다 두 배 가격에 사겠다며 접근해왔다. 반미 좌파 성향의 남미 민족주의자가 많았던 카스트로 정권은 결국 공산권 편입을 택했다. 소련의 집중적인 지원으로 경제개혁에 성공한 쿠바는 턱 밑의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온갖 시도에도 살아남았다. 공산권이 해체되기 전인 1970~80년대에는 ‘사회주의 모범국가’로 아프리카에 ‘혁명을 수출’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쿠바는 소련 해체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고 카스트로도 사망하고 없지만 국민 다수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하다. 압제를 극복하려던 ‘7월 26일 운동’의 정신이 아직 있다는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