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여자 오픈 전초전’ 스코티시 오픈에서 31일 우승한 이미향이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노스에어셔=AP연합뉴스
이미향(24·KB금융그룹)의 골프백은 주인을 잃고 아이슬란드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스코티시 오픈(총상금 150만달러)에 출전하기 위해 이미향은 미국 보스턴에서 출발, 아이슬란드를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도착했다. 그러나 수하물 중 골프백이 오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의 대회 경험은 두 번밖에 없던 이미향은 렌털 클럽으로 첫 연습 라운드에 나섰다. 강한(스티프) 샤프트를 쓰는 이미향에게 레귤러 샤프트의 아이언이 맞을 리 없었다. 이미향은 “볼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강한 바람까지 불어 쳐놓고도 볼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돌아봤다. 이미향은 자신의 골프백을 그 다음날인 개막 전날에야 받아볼 수 있었고 제대로 된 연습은 프로암 이벤트로 9홀을 도는 게 전부였다.
발을 동동 구르게 했던 골프백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액땜이자 엄청난 길조였다. 31일(한국시간) 스코틀랜드 노스에어셔의 던도널드 링크스코스(파72·6,390야드)에서 끝난 대회에서 이미향은 6언더파로 우승했다. LPGA 투어 통산 41승의 명예의 전당 회원 카리 웹(호주)과 허미정(28·대방건설)을 1타 차로 제쳤다. 지난 2014년 11월 미즈노 클래식 이후 거의 3년 만의 LPGA 투어 통산 2승. 우승상금은 22만5,000달러(약 2억5,000만원)다.
한국 선수들은 박성현(24·KEB하나은행), 김인경(29·한화)에 이어 3주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올 시즌 21개 대회 가운데 벌써 11승. 아직 13개 대회가 남아 있어 이대로면 최다승 기록인 2015년의 15승을 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향은 첫 우승 이후 우승 없이 톱5 진입 다섯 차례로 애를 태웠는데 이번에는 기대도 안 했던 우승이 선물처럼 품에 안겼다. 컷 통과 기준인 5오버파보다 1타 적은 스코어로 겨우 3라운드에 진출한 그는 2라운드까지는 공동 39위에 처져 있었다. 3라운드까지도 공동 선두 김세영(24·미래에셋)과 웹에게 6타나 뒤진 공동 6위. 이미향은 그러나 마지막 날 전반 9홀에만 버디 6개(보기 1개)를 작렬, 웹과 같은 공동 선두로 후반을 맞았다. 이후 14번홀(파5)에서 웹의 그린 주변 칩샷이 그대로 들어가 이글로 연결됐다. 이미향은 지루한 파 행진을 벌이고 있던 터라 단숨에 2타 차로 달아난 웹의 우승으로 기우는 듯했다. 실제로 많은 국내 골프팬들이 여기까지 TV나 인터넷 중계를 보다가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웹은 세 홀을 남길 때까지도 2타 차 단독 선두였다.
그러나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였다. 앞 조의 이미향은 17번홀(파4) 두 번째 샷에서 실수를 범했다. 갑자기 강해진 바람 탓인지 그린을 훌쩍 넘어 러프에 떨어진 것. 이미향은 그러나 솟은 그린을 향해 높게 띄운 샷을 홀 2.5m에 떨어뜨린 뒤 정확히 가운데로 파 퍼트를 넣었다. 이사이 웹이 16번홀(파4)에서 보기를 적은 터라 이미향의 퍼트 성공은 버디 같은 파 세이브였다. 이제 1타 차. 웹은 크게 흔들렸다. 17번홀(파4) 티샷에 이어 세 번째 샷마저 ‘항아리 벙커’에 빠뜨렸다. 네 번 만에 그린에 올렸으나 2m 남짓한 보기 퍼트를 놓쳐 더블 보기. 1타 차로 역전당한 웹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미정과 함께 5언더파 공동 선두로 18번홀(파5)을 맞은 이미향은 자신이 선두라는 사실을 끝까지 몰랐다고 한다. 웹이 7언더파까지 가는 것만 확인했기에 마지막 홀에서 이글을 해야 동 타인 줄 알았다고. 이글 퍼트를 놓쳐 버디를 적고는 아쉬움에 혀를 쏙 내밀었다. 경기 후 대기 중이던 이미향은 웹이 벙커에서 친 세 번째 샷이 들어가지 않아 자신의 우승이 확정됐다는 얘기에 놀란 토끼 눈이 됐다. 4라운드 스코어는 버디 7개, 보기 1개로 6언더파 66타. 6타 열세를 뒤집는 우승은 올 시즌 최다 타수 차 역전승 기록이다.
돌아보면 이번 대회 들어 가장 강한 비가 쏟아진 것은 3라운드였는데 이미향의 경기 시간만은 절묘하게 피해갔다. 그는 3라운드에 68타를 쳤다. 3·4라운드에 모두 60대 타수를 지킨 선수는 이미향이 유일하다. 반면 웹은 이번 대회 70홀 동안 한 번도 볼을 벙커에 빠뜨리지 않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 벙커에 발목 잡혔다. 그는 경기 후 “마지막 홀에 리더보드가 없었다”며 대회 운영에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반드시 이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홀에 붙이는 전략 대신 공격적으로 공략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미향의 우승으로 스윙코치인 캐머런 매코믹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조던 스피스(미국)와 유소연(27·메디힐)을 지도하는 매코믹은 올 초부터 이미향도 가르치고 있다. 매코믹은 스피스의 브리티시 오픈 우승과 유소연의 세계랭킹 1위 등극에 이어 이미향의 우승 가뭄 해갈까지 도우면서 올 시즌 가장 용한 조련사로 떠올랐다. 이미향은 “브리티시 여자 오픈(오는 8월3일 개막하는 메이저대회) 대비 차원에서 나선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자신감이 커졌다. 메이저 첫 우승을 위한 준비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