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현이 일제 치하 갖은 고초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여성 캐릭터 오말년으로 돌아왔다. 특히 이정현은 강인한 조선 여성 ‘오말년’ 역을 위해 36.5kg까지 감량하였으며, 탈출 액션의 총격씬을 직접 소화해내는 등 남다른 투혼을 발휘하였다.
배우 이정현이 분한 오말년은 말로 다 못할 사연과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게 스스로를 다져온 여인이다.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는 당찬 모습을 선보임과 동시에, 자신보다 연약한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품고 어루만지는 의연한 모습으로 먹먹한 슬픔을 전한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 군함도(하시마, 군함 모양을 닮아 군함도라 불림)에 강제 징용된 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개봉 첫날 역대 오프닝 최고 신기록(97만)을 경신한 것을 시작으로 개봉 2일째 100만, 3일째 200만, 4일째 300만, 5일째 400만 관객을 돌파한 가운데 개봉 첫 주 누적 관객수 406만 관객을 기록하며 폭발적 흥행세를 보여주고 있다.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인터뷰 현장에서, 이정현은 “‘군함도’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이다. 거기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커서 국내외 다큐를 거의 대부분 섭렵했다”고 밝혔다.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어요. 뼈아픈 역사를 다룬 소재인데다 현재 생존해 계신 피해자들도 있으니 연기할 때 걱정이 앞섰어요. 연기하는 내내 그 생각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일본인 위안부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던 말년은 군함도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유곽’으로 보내지는 인물이다. 남자들도 겁내는 종로 깡패 최칠성(소지섭)에게 당차게 맞설 정도로 거침없지만, 군함도의 낯선 상황에 두려워하는 이소희(김수안)를 비롯한 조선인 소녀들에겐 든든한 언니가 되어주는 따뜻함도 지녔다. 그리고 탈출을 앞두고 망설이는 소녀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일본인을 향해 총을 겨누는 강인한 인물이기도 하다.
‘말년’은 그 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뤄진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과는 다르다. 짐승보다 못한 현실에 슬퍼하고, 그저 울기만는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일본에 당당하게 맞서면서 총을 겨누기도 한다. 또한 어린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한다.
“이걸 영화적으로 접근하다보면 감성팔이식으로 갈 수 있는데, 류승완 감독은 되게 현실적으로 가길 원하셨어요. 그게 멋있었어요. 류 감독님이 보내준 다큐멘터리였는데 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담담하게 남의 일처럼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슬픈 거예요. 저런 게 사실적 접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마지막엔 일본인들을 향해 총을 겨누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원더우먼처럼 너무 멋있었어요. 류승완 감독의 위안부 피해자는 강했어요.”
위안부 피해자 역할에 대한 책임감은 배우 스스로 체중 감량에 돌입하게 만들었다. 그는 위안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바짝 마른 몸을 가진 말년을 떠올렸다. 체중 감량을 해야겠다는 배우의 말에 류 감독은 좋아하면서 동시에 미안해했다고 한다.
“사실 류 감독님이 제게 주문한 건 아니지만 신체검사 신이나 유곽에서 노출신이 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갈비뼈가 드러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말년은 많은 고난을 보내고 온 상태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살을 빼려고 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렇게까지 빼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주·조연 배우들까지 체중 감량에 동참했고 살 빼는 식단 차가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
극중 칠성(소지섭 분)와 말년(이정현 분)은 원수처럼 만났지만, 속마음을 털어놓는 동지로 점점 발전하게 된다. 칠성과 말년의 빨래터신과 팔베개신은 핑크빛 사랑이 피어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특히 빨래터신에서 등장하는 열대과일에 대한 비하인드가 흥미롭다.
<군함도>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군함도에 끌려오게 된 평범한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 가는 과정을 통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영화 <군함도>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파할 강제 징용이라는 비극적 역사,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전쟁의 폐해와 고통을 드라마틱한 스토리, 규모감 있는 볼거리에 담아내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스태프끼리도 말년과 칠성의 관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면서 놀리기도 했어요. 특히 유곽신 이후 빨래터신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에서 칠성이 말년에게 ‘과일’을 던져주잖아요. 그런데 그 열대 과일이 바로 용과와 비파인데 그게 정력에 좋은 과일이래요. 그 디테일한 의미를 알고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어요. 로맨스를 그대로 담아내는 걸 싫어하시는 감독이라 평범한 과일에도 그렇게 디테일한 뜻이 있는 걸 알고 다들 놀랐다니까요.”‘군함도’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국뽕 영화로 보여지는 걸 경계하려는 류승완 감독의 신념과 태도가 곳곳에 묻어있다. 영화 속에선 나쁘기만 한 일본인도, 착하기만 한 한국인도 없다. 그렇기에 한국 관객들에겐 불편한 진실이 못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정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제가 마음에 든 것도 바로 그런 지점이었어요.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깨달은 점도 바로 그점이거든요. 일본과 한국 양국 편을 갈라서 한쪽에 치우치기보단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한 그 메시지가 좋았어요.
불편한 진실일 수 있지만 사실이거든요.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인들이 잡아가서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같은 조선인들이 배신해서 보내기도 했어요. 처음 그 사실을 알고는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감독님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을 하셨단 걸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책임감 있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저 뿐만 아니라 조 단역 할 없이 모두가 책임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
현장은 힘들었지만 힘든 현장은 모든 배우들이 떠나고 싶지 않은 특별한 곳이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떠나기 싫어서 현장에 파묻히고 싶을 정도로 애틋했고 따뜻했다고 한다.
배우 이정현 /사진=CJ엔터테인먼트
배우 이정현 /사진=CJ엔터테인먼트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씨 모두 항상 그 자리를 다 같이 지켰고, 상대방이 중요한 신을 찍을 때마다 항상 왔어요. 큰 오빠 같은 정민오빠, 말은 없지만 뒤에서 묵묵히 챙겨주는 지섭 오빠, 그에 비해 말이 많은 송중기씨가 상호 보완 작용이랄까. 너무 인간적인 분들과 작업을 해서 행복했어요. 세 분의 공통점은 영화에 미쳐있다는 점이요. 기승전 영화 이야기밖에 안 하는 분들이세요. 너무나 힘든 현장이었는데,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게 그런 열정이 통했기 때문이죠. 아. 우리 군함도의 히로인 김수안도 빼놓을 수 없어요.”1996년 ‘꽃잎’ 이후 굵직하고 임팩트 있는 역할로 주로 관객들과 만나온 이정현은 “저희 영화로 인해 ‘군함도’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조금 더 기억해주시면 좋겠다”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현재 군함도는 강제 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지워진 채,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관광지로만 홍보되고 있다. 2015년 7월 5일,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로 노역한 하시마 탄광 등 일본의 근대산업시설 23곳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철강, 조선 그리고 탄광산업’이라는 이름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등재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강제 노역이 동원됐다는 역사적 사실의 반영을 놓고 막판까지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받아들여 극적으로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었다.
일본 측은 1940년대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해당 시설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안내 센터 설치 등을 약속했고, 2017년 12월 1일까지 이를 실행하여 그 결과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보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등재 이후 약 2년 가까이 흐른 현재까지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한편, 26일 개봉한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을 당했던 군함도의 숨겨진 역사를 모티브로 새롭게 재창조한 작품. 배우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이경영, 김수안 등이 출연한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