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서울 영등포구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강의실 창문에 학생들이 적어 놓은 ‘성에 관한 궁금증’ 메모가 붙어 있다./신다은 기자
“그냥 격려하려고 한 거죠. 그녀도 내가 좋아서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닙니까.” 직장에서 부하직원의 몸을 더듬어 가해자 성 인권교육을 받게 된 40대 남성 A씨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에게 이같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한참을 듣던 이 소장은 피해자의 심적 고통을 설명하며 “성희롱은 섹시한 로맨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을 붕괴시키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김씨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들이 싫다는 게 정말 싫다는 뜻인지 몰랐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가해자 성 교육을 진행하면 종종 마주하는 장면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누군가에게 성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되레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이 많다. 이 소장은 “이미 가해자가 된 상태에서 시정 교육을 받는 것보다 학교에서부터 소규모 토론 등을 일상화해 왜곡된 성 통념을 바로 잡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이뤄지고 있는 성 교육은 현실과 딴판이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연간 15시간 이상 의무적으로 성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문제는 신체·보건학적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성 친구와 단둘이 집에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등 성폭력 예방법 등은 피상적 수준에 그치는 실정이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지금 다수의 청소년은 성 상품화된 일상에 노출돼 있다”며 “여기서 얻게 된 성별 고정관념을 어떻게 풀지 등을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하지만 현재 교육은 혼자 알아서 올바른 성 가치관을 쌓으라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학교에서 성 교육 담당 교사가 마주하는 질문들은 ‘왜 겉으로 드러나는 성에 관한 이야기는 더럽다고 생각할까요’ ‘여자가 몇 번 경험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등 성에 대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해당 교사가 이해시키고 설명하는 데는 적잖은 제약이 뒤따른다.
박슬기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팀장은 지난해 여름 서울의 한 중학교에 성교육을 부탁받고 출강했다가 학교와 현실 간 괴리를 경험했다. 담임교사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 “자위나 야동·동성애는 해로운 단어니 사용하지 말라. 결혼 후 출산해서 아이를 낳는 과정만 강의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박 팀장은 “요즘은 온·오프라인에 성 관련 정보가 넘쳐난다”며 “성 교육은 성과 관계에 대한 자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게 관건인데 학교 공간은 여러 제약이 많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사람을 욕구충족 대상이 아닌 인격체로 보고 관계를 어떻게 평등하게 맺을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상과 교육의 괴리를 인식한 정부도 본격적인 간극 메우기에 나섰다. 여성가족부와 교육부는 왜곡된 성 의식을 고착화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성 교육 표준안’에 대해 재검토에 들어갔다. 여가부의 한 관계자는 “현실과 맞지 않은 내용에 대해 여가부가 의견을 개진하고 의무 성 교육 시간뿐 아니라 교육 전반에 올바른 성 가치관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다은·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