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와치] 신약, 불멸의 삶을 위한 불멸의 도전

질병 정복 위한 인간의 긴 여정
신약 출시까지 0.02% 확률 도전
개발 성공땐 돈방석 보장되지만
실패땐 기업 존립 기반까지 흔들

‘신에 대한 무모한 도전인가, 인간의 탐욕이 만든 과학의 결정체인가’

중국 전한 시대의 동방삭은 갑자년(甲子年)을 3,000번 보내고 18만년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이 허무맹랑한 설화에는 세대와 시대를 초월해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을 ‘신약’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걸리는 질병은 3만여가지다. 우주 넘어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 인공지능이 바둑을 두는 세상이지만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은 6,000여가지에 불과하다. 나머지 질병을 정복하기 위해 인간은 오늘도 ‘신약’ 개발이라는 명제를 놓고 성공과 좌절을 오간다.

신약 개발은 신이 던진 수학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질병’이라는 문제가 주어지면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파악한 뒤 적절한 치료물질을 골라낸다. 신약이 될 법한 후보물질을 발굴하면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고 수정과 보완을 거쳐 최종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과정이지만 길게는 수십년의 시간에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비용을 쏟아 붓는다. 후보물질 탐색부터 신약 출시까지 성공 확률은 0.02% 주변을 맴돈다.

신약 개발은 불치병과 난치병을 하나씩 정복해나가는 역사다. 흑사병과 천연두를 치료하는 신약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종말을 맞았을 것이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인간의 집념과 도전이 신약 개발을 멈추지 않게 한 원동력이다. 지난 1897년 세계 최초의 합성의약품 ‘아스피린’이 탄생한 지 120년이 흐른 지금, 인간은 암과 치매의 정복까지 앞두고 있다.


신약에는 자본의 욕망도 꿈틀댄다. 수년째 글로벌 의약품 매출액 1위를 달리고 있는 애브비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는 지난해 18조원어치가 팔렸다. 국내 제약산업 전체 규모가 20조원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천문학적인 규모다. 화이자는 2012년 고지혈증 치료제 ‘리피토’를 출시해 그해에만도 13조원을 벌었다. 사람을 살리는 신약은 기업도 살린다.

막대한 부가가치를 안겨주는 신약이지만 성공으로 이어지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등재된 임상시험 신약은 2만여개나 되지만 매년 ‘승인’이라는 등용문을 통과하는 신약은 20개 안팎에 불과하다. 사실상 개발에 실패했는데도 수십년째 임상시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신약도 부지기수다. 미국 제약협회는 “혁신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2억달러가 든다”고 밝혔다. 이처럼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도 신약 개발에 실패하면 기업의 존립마저 흔들리게 된다.

우리나라도 1999년 국산 1호 신약을 시작으로 신약 개발의 역사를 이어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글로벌 제약사의 신약이 매년 수천억원에서 수십조원의 매출을 올리지만 국산 신약에서 매출 100억원을 넘기는 품목은 5개에 불과하다. 판매가 부진해 사실상 생산을 중단한 제품도 6개에 이른다. 경쟁력 갖춘 신약을 개발했더라도 언제든지 후발주자에 자리를 빼앗기는 게 신약 시장의 냉혹한 현실이다.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이 신약 개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지만 신약이 가져올 미래는 마냥 장밋빛이 아니다. 질병이 사라지는 세상이 도래하면 생명보험사가 파산하고 진단과 수술에 주력했던 병원은 장기 교체 전문 서비스나 신약 추천 클리닉으로 역할이 뒤바뀌게 되며 경제적 약자가 신약을 구하지 못해 일찍 사망하는 ‘메디컬 디바이드(의료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급부상할 것이다.

진동훈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 교수는 “현대 과학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신약 개발은 그 자체로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도전과 실패의 역사”라며 “인간이 있는 곳에는 늘 질병이 있기에 신약이 개발되면 또 다른 질병이 등장해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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