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제 개혁을 향한 세종의 집념

‘호조에서 서울과 지방의 공법 시행에 관한 찬성과 반대 의견에 대해 아뢰기를(戶曹具中外貢法可否之議以啓)…(중략)…찬성하는 사람은 9만 8,657명이며 반대가 7만 4,149명입니다(可者, 凡九萬八千六百五十七人, 否者, 七萬四千一百四十九人).’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년 8월 10일 자에 수록된 5번째 기사의 일부다. 상식적으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기록이다. 찬성과 반대를 합하면 모두 17만 2,806명.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회(民會)의 직접 투표도 아니고 조선 시대 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찬성과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는 말인가.

조선의 관리들이 일일이 물어서 결과를 모았다. 안건은 세금 제도 개혁. 공법 시행에 대한 찬반(贊反) 의사를 물었다. 공법이란 일종의 정액 징수제. 중국 하(夏)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도다. 당시 조선 조세 제도의 근간은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 해마다 풍흉(豊凶 ·풍작과 흉작) 정도를 조사해 세율을 정하는 제도였다. 해마다 국가가 정하는 사람이 작황을 고려해 세금을 매기는 이 제도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이라고도 불리며 일종의 성역으로 받아들여졌다. 만든 인물이 태조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실권을 쥐고 있던 1391년 이 제도를 만들었다. 건국(1392년) 이래 조선 세법의 근간이었다.

태조의 작품이어서 누구도 고치자고 말 못했지만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논과 밭의 상태와 소출을 제대로 평가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데다, 평가관이 재량권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고 여겼다. 평가관에 대한 접대 폐단이 드러나고 전답을 평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즉위 때부터 세법을 손보겠다고 다짐했던 세종은 즉위 9년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 신하들은 세종과 생각이 달랐다. 특히 좌의정(당시) 황희를 비롯한 중앙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다. 황희를 필두로 한 신하들은 자칫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우려된다며 세종의 실행을 말렸다.

신하들의 반대에 봉착한 세종이 꺼낸 카드가 바로 여론조사였다. 세종은 전답(田畓) 1결(結: 경작지 단위, 1결은 약 3,025평 또는 1㏊)당 10말을 정액 징수하겠다는 방안에 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물었다. 호조와 지방 관헌들이 4개월 반 동안 파악한 결과, 찬성이 57.1%로 반대 42.9%보다 많았다. 세종은 내심 바라던 결과를 얻었으나 공법을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중앙 공무원들의 반대가 많았다. 정 3품 이하 당하관 652명 가운데 393명(60.3%)이 반대 의사를 보였다. 특히 당상관(전직 포함)들은 215명 중에서 194명(90.2%)이나 반대편에 섰다.

세종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요인은 지역별 편차. 전라도(찬성률 99.1%)와 경상도(99.0%), 경기도(98.6%), 개성부(94.1%)는 절대적 지지를 보낸 반면 산세가 험하고 소출이 적은 함길도(1%), 평안도(4.5%), 강원도(12.0%)의 찬성률은 극히 낮았다. 토지가 비옥한 지역은 세금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 반면 척박한 지역은 소출과 관계없이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상·전라도에서는 한 결에서 소출이 많으면 50~60석(쌀 한 석은 약 144㎏)을 넘고 적어도 20~30석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반면 함길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에서는 같은 면적의 전답에서 소출이 5~6석에 그쳤으니 정액제 납부를 몰락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였다.


결국 세종은 실행 계획을 일단 접고 신하들과 더불어 해결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세종이 대안 모색에 골머리를 앓는 와중에서도 대신들은 더욱더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대부분 ‘부의 편중이 오히려 심화할 수 있다 ’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속셈이 다른 신하들도 많았다. 공법제가 시행되면 이전보다 세 부담이 감소하는 데도 양반 대신들의 반대는 줄기찼다. 투명한 조세 행정으로 인한 ‘착복의 원천 봉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 방안이 마련된 시기는 세종 26년. 즉위 이후부터 이 문제를 고민했다면 25년 이상, 논의가 처음 시작했던 시기를 기준으로 삼으면 14년이 지난 세종 26년(1444)에서야 왕은 공법 시행에 나섰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6 단계로 나누는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과 농사의 풍·흉작, 기상 이변에 따른 손실을 면세해주는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을 축으로 삼는 조선 특유의 공법이 완성된 것이다.

공법 제도를 만들기까지 세종은 세계사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 성인 남자의 상당수가 설문에 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32년 발간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의 성인 남자는 69만2,477명. 성인 남자의 24.9%가 조세 개혁에 대한 의견을 조정(정부)에 제출한 것이다. 군주 시대에 이처럼 사실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가며 세제 개혁에 나선 사례는 세종대왕 뿐이다. 오늘날의 법률 개정 절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오기수 김포대학 교수(세무회계정보과)의 저서 ‘세종 공법’에 따르면 세종의 조세 개혁은 세계적으로 최장기 논의와 토론을 거친 입법에 해당된다. 세종실록 21년 기사에 ‘내가 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 이제 20여 년’이라는 기록에 미루어 볼 때 세종은 25년 동안 세제 개혁을 추진한 셈이다. 대신들과 논의를 기준 삼아도 공법 마련에 소요된 기간은 15년에 이른다. 세종실록에 공법에 관한 기사명이 55건이라는 점은 조세 개혁에 대한 세종의 집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세종은 조정에서 공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과거 문과 시험에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직접 출제, 젊은 유생들의 의견까지 다양하게 들었다. 세계 수준의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한 이유도 공법 시행을 앞두고 전답의 비옥도와 홍수 피해를 정교하게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랜 기간을 집요하게 공법에 매달렸을까. 위민(爲民), 즉 백성을 위해서다. 공법 체제가 정비되기 전까지 무려 15년 동안 공법을 반대했던 정승 황 희의 반대 이유도 마찬가지다. 황 희는 빈익빈 부익부를 야기한다면 백성을 위하는 게 아니라며 끈질지게 문제점을 파고 들었다.

세종이 전 생애를 거쳐 심혈을 기울인 공법은 성공했을까. 불분명하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일부 조항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으니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공법으로 재정 여건이 크게 나아졌거나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조선의 쌀 생산량은 세종시대의 전성기를 다시는 재연하지 못했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 조선 조정의 세입은 세종대왕 시절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란을 겪기 전 연산군 시대에 사치와 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조선 경제의 상흔(傷痕)은 치유되지 않은 채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실상의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587주년을 맞는 오늘날, 세종대왕이 보여준 인내와 끈기, 절차적 정당성을 미리 확보하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의 어떤 지도자와도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다. 예전과 비슷한 것도 있다. 조세 개혁에 대한 저항.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던 조선의 지주들과 무조건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닮은 꼴이다. 세종 시절에 정점에 달했던 재정 여건이 갈수록 나빠진 점도 21세기의 한국을 보는 것 같다. 새 정부의 조세 개혁이 이 성공하기 바란다. 세종대왕이 보여준 집념과 절차적 합법성 준수, 위민 사상이 절실한 시대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i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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