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2017 청년을 말한다'] 유학파도 토익 열공 '스펙증후군' 여전..."중기 취업도 생각중" 62%

<3>답 없는 청춘 -설문으로 본 최악 취업난
부모·지인들도 "중소기업 입사 반대 안해" 86%
좋은 일자리 선택의 기준은 '직장내 문화' 꼽아
문재인정부 청년일자리 정책 그저 그렇다" 62%

지난 8일 여름휴가 시즌에도 불구하고 취업준비생들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어학원 1층 카페에서 각종 자격증과 시험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백주연기자


2017년 여름을 살아내고 있는 20~34세 이하 100명의 청년들에게 현재 한국의 취업시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자격증·공인점수’ ‘비(非)대기업’ ‘월급보다 기업문화’ 등 세 가지 키워드가 돌아왔다. 오늘도 일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학원에서, 카페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들로부터 ‘청년이 말하는 취업, 그들이 사는 세상’을 들어봤다.

토익·HSK 점수 따는 해외 유학파들 “한국은 자격증 사회”=여름휴가의 절정이라는 8월 초. 인천공항 출국장이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라지만 서울 종로 어학원 자습실과 근처 카페는 취업준비생들로 붐볐다.

5~6년 전부터 서류 조건을 따지지 않는 ‘스펙 철폐’가 대세로 떠올랐지만 청년들은 믿지 않는 눈치다. 해외 유학파 출신들까지 합세해 자격증과 어학점수에 목을 매고 있다. 새 정부가 공기업 서류전형에서 증명사진과 토익 점수 등을 제출하지 않도록 한 것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얼음이 녹아 물처럼 변해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옆에 두고 2시간째 어학원 자습실에서 토익 단어를 외우던 이종명(27)씨는 “어학점수는 다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 할 수 없다”며 “하반기 채용 시작 전에 900점을 만들기 위해 4개월째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근처 다른 어학원에서 만난 윤가나(27)씨는 HSK 6급 시험 기출 단어를 연습장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윤씨는 중국 베이징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그는 “중국어 회화는 문제없지만 자격증이 없으면 서류전형을 통과할 길이 없고 회사에서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카페에서 만난 김주혁(26)씨는 지난 1일에 발표된 토익 점수가 예상보다 낮아 이번 달에 다시 응시했다. 미국 동부 지역 주립대를 졸업한 김씨는 “일상에서는 쓰는 단어가 한정돼 있다보니 950점을 넘지 못했다”며 “한국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사 1급 시험도 볼 예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어학원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토익수업을 듣고 있다. /백주연기자



“대기업만 안 바라…월급 200만원이면 감사”=휴가도 반납하고 각종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청년들은 대기업 취업만을 꿈꾸는 것일까. 오해였다. 무역 관련 중소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이씨와 윤씨의 목표다.

그들은 “대기업은 바라지도 않고 월급은 180만~200만원만 받으면 감사하게 다닐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경제신문이 청년이여는미래와 공동으로 청년 1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중소기업 인식’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2%가 비(非)대기업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니 좀 더 높은 연봉을 바랄 수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1991년생인 이씨는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는 덤이라는 붐이 본격적으로 일던 때 학창시절을 보냈다”며 “심한 경쟁과 취업난이 맞물려 꼭 대기업 취업만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세대 특성도 큰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본지 조사에서도 취업준비생들은 ‘발전 가능성이 높아서’ ‘적성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중소기업 입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주변 지인들도 딱히 중소기업 입사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86%로 높게 나타났다.

김씨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외국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심해지고 비자받기도 까다롭다”고 말했다. 그는 “유학파들이 되돌아오는 현상도 최근 취업난을 가중시키는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 월급보다 기업 문화가 더 중요=입사 의향이 있음에도 중소기업 취업을 기피하게 되는 이유로는 ‘열악한 근무환경과 시대에 맞지 않는 기업 문화’를 꼽았다. 설문에 응답한 청년들은 ‘좋은 일자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직장 내 문화(62%)’를 들었다. ‘임금’은 21%로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자아실현’도 16%나 됐다. 취업난이 심한데도 청년들이 쉽게 퇴사하거나 처음부터 중소기업에 마음을 닫는 것은 월급보다 기업 문화가 문제인 셈이다.

윤씨는 “강남에 있는 광고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입사한 지 이제 갓 1년 됐는데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며 “야근을 덜하고 직장 내 권위주의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성세대는 우리를 보면서 ‘끈기가 없다’거나 ‘편하게만 살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지향하는 삶의 가치관이 다른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청년 일자리 관련 정책에 대해서는 ‘그저 그렇다’라는 응답이 62%를 차지했고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25%에 불과해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백경훈 청년이여는미래 대표는 “예전 정부도 청년 일자리 정책을 편다고 했지만 청년들 입장에서는 피부로 와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변화가 없다 보니 정책에 대한 불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신규 채용이 줄어들까 우려하는 청년들도 많다”고 강조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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