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청년은 숲 속 오두막 생활을 계속하며 책을 썼다. ‘국가나 법이 비양심을 요구한다면 저항하라’는 ‘시민 불복종(원제 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 or Civil Disobedience, or On the Duty of Civil Disobedience·1849년)’이 이렇게 나왔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시민의 적극적인 항거를 주장한 청년의 이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년 태어나 1862년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45년 평생을 고향 매사추세츠 콩코드에서 지낸 문필가다.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 감옥 경험을 옮겼다. ‘돌과 회반죽으로 된 감방은 제구실을 못했다. 한순간도 나를 갇혀 있다고 느끼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작 감옥에 갇힌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고 나만이 유일하게 세금을 내고 감옥 바깥에 있는 자유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중략… 나의 육신을 감금하고 내가 수감된 감방문을 철통같이 지켰지만 나의 정신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듯이 나의 정신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감옥들 드나들었다.’
감옥에서 자유를 느꼈던 청년 소로는 생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사후 시간이 흐를수록 재조명받는 분위기다. 단순한 문필가에서 시인이며 사상가, 노예폐지론자, 식물학자, 조세저항운동가, 문명 비평가, 역사가, 생태주의자로서 소로의 면면을 다루는 국내외 연구논문이 수없이 많다. 하버드대(영문학)를 졸업할 때부터 그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돈과 출세 대신 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택한 것. 임시직 교사와 측량기사로 일하다 선배이자 자연주의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Edward Waldo Emerson:1803~1880)의 영향을 받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단신으로 숲에 들어갔다.
문명 세계와 단절은 체념이나 고독을 맛보려는 경우가 많지만 소로의 경우, 오히려 반대였다. 그의 대표작인 ‘월든(1854년 출간된 초판 제목은 ’월든 또는 숲 속의 삶: Walden; or, Life in the Woods)‘에 숲에 들어간 이유가 나온다.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내가 월든 호수에 간 이유는 보다 싼 생활비로 살기 위해서라거나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방해 없이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소로는 ‘나 자신을 가장 나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야생 탐구를 비즈니스로, 산책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심의 구체적 행위가 숲 속의 생활. 함께 교육 운동에 나서자던 형의 병사(病死)도 영향을 미쳤다. 소로는 28세인 1845년 월든 호숫가로 향했다. 국내 서적에는 ‘호수’로 번역되지만 영어권 백과사전에서 ‘월든’은 호수(lake)보다 못(pond)으로 나오는 작은 호수. 넓이 24만 6,858㎡(약 7만 4,770여 평)로 잠실 석촌호수보다 크고 일산 호수공원보다는 작다. 에머슨의 소유지였던 월든 호숫가의 숲에서 소로는 통나무 집부터 지었다.
다락방과 벽장이 딸린 집을 대부분 혼자, 가끔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는 데 든 비용은 28달러. 가재도구로 침대와 식탁, 책상, 거울, 냄비, 프라이팬, 국자, 세숫대야, 컵, 스푼, 기름 단지, 당밀 단지, 램프가 각각 하나씩, 의자 셋과 나이프·포크 두벌, 접시 세 개가 전부였다. 소로는 가능하면 단출하게 살려고 애썼다. 먹는 것은 쌀과 거친 옥수수 가루, 감자가 전부였으나 가끔 숲에서 과일을 따 먹을 수 있었다. 소로는 매일 아침 산책하고 모든 나무와 야생 열매, 새와 동물, 호수의 변화를 눈에 담았다.
섭생과 최소한의 수익을 위해 땅을 갈아 콩과 감자를 심었다. 첫해 수익은 단돈 8달러. 하지만 걱정할 게 없었다. 모자라면 마을에 나가 날품팔이를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소로는 사실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전천후 기술자’였다. 어릴 적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구를 갖고 놀았던 덕분. 랄프 에머슨의 아들인 에드워드 에머슨이 ‘소로 아저씨’를 지켜본 경험으로 지은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에 따르면 ‘친절하고 자애로운 교사였으며 흑연 연필을 만들 수 있는 일급 기술자였고, 솜씨 좋은 정원사이자 최고의 측량기사였다. 목수이자 작가였으며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플루트연주자이면서 철학자이자 누구보다 조예가 깊은 생태학자였다.’
의사나 법률가, 고위 공무원 코스를 향하던 여느 하버드대 졸업생들과 달리 소로는 고향 콩코드에서 삶을 즐기는 노동자로 살았다. 한 가지 노동에 종속되지 않고 필요한 노동을 자급자족하다 보니 그의 기술은 다채로울 수밖에 없었다. 소로는 노동을 활짝 열어 놓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웃들의 집을 고쳐주고 정원을 손질해줬으며 강연을 하고 악기를 불었다. ‘월든’의 첫 장인 ‘숲 속의 경제학’에는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면서도 자신의 시유를 날카롭게 다듬는 소로의 모습이 나온다. 소박한 생활을 추구한다면 1년에 6주만 일하고도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음을 소로는 입증했다. 월든에서 소로의 삶은 넉넉했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월든을 떠나 소로는 45세 짧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주로 저술과 강연 활동에 매달렸다. 측량도 꾸준히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데다 비싼 강연료를 요구하지 않았기에 강연 수입은 남들보다 훨씬 적었다. 출판 수입 역시 신통치 않았다. 자비로 출판한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은 초판 1,000부 가운데 300부만 팔렸다. ‘시민 불복종’은 얼마나 팔렸는지 통계조차 찾기 어렵다. 37세에 출간한 ‘월든’ 역시 죽을 때까지 8년간 2,000부 남짓 나갔을 뿐이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비롯해 철도 투기와 주식 투자 붐이 일던 시기에 돈과 물질문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과 영혼이라던 소로는 죽은 이후에야 세인들의 평가를 얻었다. 레프 톨스토이와 존 러스킨,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등이 소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몇몇 사상가들의 감동을 자아내던 소로의 저작들이 대중의 시야에 들어온 시기는 20세기 중후반 이후부터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 성장의 한계를 지적한 로마클럽 보고서 시리즈 등이 나오며 소로는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자연을 정복과 식민화의 대상으로 삼아온 서구문명의 근대사를 생태 중심적으로 전환하자는 움직임도 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개발과 기술 중심의 사고는 여전하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도 준수하는 파리기후협약을 깨트리려고 한다’는 비아냥에도 아랑곳없이 공해 산업의 밸브를 열 태세다. 지성과 진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선동꾼이 판친다는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의 시대여서 소로의 정신은 더욱 빛난다. 소로가 마치 21세기를 위해 ‘시민 불복종’과 ‘월든’을 남긴 것 같다.
소로가 ‘시민 불복종’에서 알려준 막무가내식의 권력에 대응하는 방법.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살아가리라. 누가 가장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소로의 생각은 공자(孔子)에도 맞닿는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8편). 19세기 소로의 생각은 시대를 초월해 21세기 양극화에도 교훈을 준다. ‘한 계층의 사치스러운 삶은 다른 계층의 빈곤과 나란히 균형을 이룬다. 한쪽에 궁궐이 있으면 다른 쪽에는 구빈원과 입 다문 빈민들이 있다’, ‘잉여의 부(富)로는 잉여품만 살 수 있다. 영혼의 필수품을 사는 데 돈은 불필요하다’.
유희석 전남대 교수(영어교육과)는 연구논문 ‘월든과 근대 세계’를 통해 소로의 가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비인간적 자본 축적과 증식을 추구하는 반생태적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대안적 사유를 제시하는 작품’. 한국에도 소로는 특별하다. 유 교수가 위 논문에서 맺은 결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압축적 근대를 경험한 한국의 독자에게도 윌든(과 소로)의 온전한 상속은 만만치 않은 지적 도전인 동시에 과제로 남아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