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 칼럼] 장병을 ‘아들’보다는 시민으로 존중해주시라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시민병 사상, 서구문명 확산 견인
노예병 취급 군대는 패전 일삼아
韓국민개병제, 일본군 적폐 답습
장병을 '제복 입은 시민' 대우해야



군이 공관병 제도를 당분간 유지할 모양이다. 공관병이나 관리병을 없앤 뒤 민간인력으로 대체하는 방안이 아직 살아 있지만 예산 문제가 걸려 있단다. 유지 방안은 감정적으로 시원하지는 않아도 합리적인 결정이다. 창군 69주년을 맞도록 제도가 운영돼왔다면 그만큼 필요했다는 얘기다. 드러난 적폐(積弊)를 도려내면서도 제도의 취지는 살리는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새로 마련될 개선 방안에 꼭 반영돼야 할 것이 있다. 인식 변화가 요구된다. 공관병에 대한 ‘갑질 논란’을 빚은 박찬주 대장의 부인 전모씨는 ‘공관병을 아들처럼 여겼다’는 말을 남겼다. 나이 많은 군의 간부라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자식을 군대에 보낸 아비의 입장에서 고마운 말씀이기도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세상에 나쁜 부모가 얼마나 많은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를 시민으로 대우하는 자세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 시민 병사의 상등(常等) 관계는 뿌리가 깊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민으로 구성된 중장갑보병대(phalanxes)는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를 번번이 눌렀다. 로마가 국력을 뻗어 나갈 수 있었던 바탕에도 ‘로마 시민=군단병’이라는 등식이 깔려 있다.

신분제 사회가 구조화한 중세를 맞으며 사라졌던 시민 병사는 프랑스혁명기에 다시 태어났다.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이 국경을 넘을 경우 절대왕권 유지가 어렵다고 본 유럽 각국의 왕실은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혁명 과정에서 귀족 지휘관들이 망명하거나 처형된 가운데 외침 위기를 맞은 프랑스는 능력에 따라 군 간부를 중용하고 전 국민을 동원 대상으로 삼았다. 국민총동원령 체제 아래 프랑스는 위기를 넘겼다.


미국의 전쟁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저서 ‘살육과 문명’에서 서구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간 근간에는 시민병 제도에서 나오는 군사적 우위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핸슨의 관점에 따르면 병사들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노예병인 양 부리는 간부가 있다면 군의 전력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이적행위자와 다르지 않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국민개병제를 채택하면서도 시민병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영향 탓이다. 프랑스를 넘어 프로이센으로 넘어간 국민개병제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게르만족의 특성과 융커(귀족지주)제가 발달한 프로이센의 환경과 맞물려 기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군대 문화를 낳았다. 대규모 열병과 분열이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근대화 과정에서 세계를 교실로 여겨 군사 부문을 독일에서 수입한 일본에서 서구 시민병의 전통은 다시금 변질됐다. 메이지유신 전까지 일반 백성들을 처형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던 사무라이 계급(士族)의 대부분이 장교로 변신한 일본군에서는 간부뿐 아니라 병사 간의 구타와 기합이 판쳤다. 독일과 일본의 군대는 강한 것 같았지만 결국 민주시민들의 권리가 군대에서도 존중받는 나라의 군대에 졌다. 소련의 몰락도 마찬가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모범적 민주국가로 재탄생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군으로 눈을 돌려보자. 패전 후 재창설된 독일군은 전과 180도 달라졌다. ‘제복을 입은 시민(citizen in uniform)’의 권리를 한껏 누리는 독일군은 병사의 자살률이 가장 낮은 군대로 손꼽힌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 고종 황제는 징병제를 끝내 마다하고 돈이 많이 드는 모병제에 매달렸다. 개병제가 채택되면 국민적 권리(citizenship) 의식이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결국 망국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강한 군대는 병사가 시민으로 존중받고 제 역량을 다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격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대표작 ‘노예의 길’에서 자유시장경제(자본주의)와 계획경제(공산주의)의 차이를 자유와 굴종·독재·노예화라고 비교하며 후자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군도 마찬가지다. 장병을 노예처럼 생각하는 군대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 장병을 아들처럼 여기기보다는 자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시라. 군 개혁의 시발점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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