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8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배넌 수석전략가를 경질하기로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백악관도 성명을 내 “오늘이 (백악관에서) 배넌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데 존 켈리 비서실장과 배넌 간에 상호 합의가 있었다”고 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7일께 그를 해임하려다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 시위가 격렬하게 일며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샬러츠빌 시위 참가자를 두둔하고 인종주의에 반대한 집회 참가자들까지 양비론으로 비판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에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백악관 자문위원회를 떠나고 공화당도 등을 돌리자 배넌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됐다. 샬러츠빌 집회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잘못된 대응을 배넌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배넌이 지난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해법은 없다”며 “주한미군 철수 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는 민감한 발언도 서슴없이 내뱉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경고와 정반대의 언급을 한 것이 경질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후문이다.
CNN은 배넌의 경질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와 국수주의의 배후로 지목된 백악관 내 가장 논란이 큰 참모의 퇴출을 의미한다”며 “‘트럼프 세계’에서 배넌의 이데올로기가 더는 중심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실제 배넌은 지난해 8월 폴 매너포트 트럼프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이 ‘러시아 커넥션’으로 낙마하자 소방수로 수혈돼 위기의 트럼프를 끝까지 지켜냈지만 정권교체 후 반(反)이민정책과 파리기후협정 탈퇴 등 논란과 반대가 많은 정책들을 강행해 의회는 물론 트럼프 정부 내 인사들과도 충돌을 거듭했다.
국수적 고립주의자인 배넌이 물러남에 따라 국제사회 문제에 적극 관여해온 미국의 전통적 개입주의 노선이 부활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배넌과 대척점에 있던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입지가 한층 탄탄해졌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등의 운신 폭이 커졌다. 실제로 매티스 장관은 중동 순방을 위해 요르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매티스 장관은 결정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파병 군사력 감축’ 기조를 ‘증강’으로 180도 바꿀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연합(EU)과의 갈등이나 한국·일본 등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도 완화되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트럼프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대북정책에서 보다 큰 당근과 채찍이 등장하며 북핵 해법 시계가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관계에도 일련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음을 예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20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도 배넌의 퇴출로 미중 간 무역갈등 완화 등이 예상된다고 평했다.
자신이 창업한 극우성향의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로 복귀할 예정인 배넌은 경질이 아니라 자진사퇴라고 강조하면서도 “트럼프 정부가 훨씬 더 평범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우리가 싸워 쟁취한 ‘트럼프 대통령직’은 끝났다”면서 “경제민족주의나 이민 같은 이슈를 추진하는 데 대통령은 훨씬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트위터에 “배넌에게 감사한다”면서 “브레이트바트에서 터프하고 영리한 새 목소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표하며 ‘가짜뉴스’와 경쟁해달라고 주문했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