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답답한 2030 "낯선 이여, 내 얘기를 들어주오"

가면 쓴채 속내 나누고 위로·공감
타인과 익명대화 캠프·모임 인기
지인 사이에선 감정 전가 부담
"개인비밀 보안 유지하면서도
감정 분출하기 좋아 홀가분"

19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1가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개별적 몸들의 문답-몸의 대화’ 참가자들이 게임을 하면서 내면의 감정을 분출하고 있다./사진제공=몸의대화
“제 얼굴과 몸에 자신이 없어요. 세상에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까 생각하곤 해요.”

어둠이 깔리는 19일 오후 7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1가 골목의 한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은밀한 모임이 열렸다. 젊은 남녀 22명은 흰색 외계인 가면 속에 표정을 감추고 조심스레 자신의 비밀을 나누기 시작했다. 스스로 ‘숲 속에 사는 외계인’이라 소개한 한 20대 여성은 외모 콤플렉스에 대해 얘기하다 눈물을 쏟았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여성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 몰랐다. 힘들었을 것 같다”며 책상에 놓인 ‘공감’ 사탕 통에서 사탕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지인들과 내밀한 대화를 주고받기를 꺼리는 2030 청년들이 낯선 이들과 대화할 공간을 찾아 나섰다. 주변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 ‘감정 배출만을 위한 익명 모임’을 찾아 나선 것이다.


대학생들이 자체 기획한 관객참여형 집단상담 프로그램 ‘개별적 몸들의 문답-몸의 대화’에는 10회 만에 210명이 참가했다. 안대를 쓴 채 둥글게 둘러앉아 고민을 털어놓거나 자신이 들었던 언어폭력을 재연한 뒤 대항해 보는 게임이 인기였다. 프로그램 참석자 홍모(26)씨는 “친구에게 구구절절 힘든 점을 호소하다 보면 어느 순간 친구가 피곤해하지 않을지 눈치를 보게 된다”며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배경설명을 하지 않아도 공감할 준비가 돼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처럼 ‘성장통캠프’, ‘고민소식’ 등 낯선 이들끼리 모여 고민을 나누는 행사는 크라우드펀딩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에선 ‘익명치유커뮤니티’, ‘모씨’ 등 익명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앱(애플리케이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자신의 속마음을 적어서 앱에 올리면 타인이 댓글을 다는 단순 게시판 형태지만 하루 게시글은 최대 1만개에 이르고 다운로드 횟수도 최대 100만회까지 기록했다. 6개월째 익명 대화 앱을 쓰고 있다는 대학생 김모(27)씨는 “친구에게 가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더니 어느 날부터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며 “내 신원을 드러낸 채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수많은 글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익명공간에 글을 쓰는 게 안전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익명토크’ 문화에 대해 “비밀 보안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분출하기 좋은 효율적 대화”라고 입을 모았다.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인은 소수의 친한 사람들만 계속 만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적 피로를 반복해서 전달하면 관계가 망가질까 염려한다”며 “반면 낯선 사람은 상담을 해도 다시 볼 일이 없어 마음이 가볍고 마음에 안 드는 조언은 무시하면 되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간편하다”고 설명했다.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답이 없는 다원주의 사회에 살다 보면 혼란스러워질 때가 많은데 그럴 때 낯선 이에게 해결책을 묻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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