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리포트] 뇌물에 성매매까지? 상품권 이대로 괜찮나

증빙 없어도 비용처리 가능한 '상품권'
수천만원 대 뇌물로 사건사고 이어져
청소년 위한 '문상', 일탈·범죄수단 전락

지난 23일 서울 명동에서 시민들이 상품권을 구매하고 있다. /권욱기자


지난 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상품권 매매 업체. 40대 여성이 들어오더니 10만원권 백화점상품권 50장을 전달한 뒤 직원에게 손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상품권을 팔러 왔다면 현금을 받아가야 하지만 이 여성은 전달만 하고 사라진 것이다. 해당 상품권 매매 업체 직원은 “상품권을 주기적으로 공급받는 곳이 따로 있다”고만 기자에게 언급했다.

이 의문의 상품권은 어디서 왔을까. 추적이 쉽지 않지만 한 상품권 매매 업체 대표의 말로 출처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상품권 매매업에 10년 이상 종사했다는 A씨는 “기업들이 법인카드로 구매한 상품권이 흘러들어오거나 상품권 유통 업체가 다른 법인에 대행을 맡겨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구매한 뒤 시장에 내놓는 물량”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백화점상품권은 법인들의 경우 구미가 당기는 상품이다. 대량구입 시 혜택이 주어지는데다 카드사의 캐시백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1,000만원 이상 상품권을 대량구매하면 구입액의 1%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추가 증정한다. 1억원어치의 상품권을 구입한다면 100만원의 상품권을 추가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다수 법인은 이런 대량구매를 통해 카드사의 캐시백 혜택까지 누린다. 주요 카드사들은 법인들이 백화점상품권을 구매할 경우 구입액의 1.8%가량을 캐시백으로 돌려준다. 결국 법인 입장에서는 롯데백화점 상품권을 구입해 2.8%가량의 추가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상품권 대량구입 시 혜택이 더욱 크다. 신세계백화점은 상품권 구매액이 3,000만~3억원일 경우 구입액의 2%, 3억원 이상일 경우 3%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추가로 증정한다. 카드사 캐시백까지 합칠 경우 법인은 3.8~4.8%가량의 추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지난 23일 서울 명동에서 시민들이 상품권 판매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권욱기자



이렇게 법인카드로 구매한 백화점상품권 가운데 일부는 유통시장으로 흘러들어 현금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깡’인 셈이다. 특히 백화점으로부터 추가 증정받은 상품권은 임의처분하더라도 회계장부에 잡히지 않아 비자금 조성 등에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한 세무사는 “법인카드로 구매하는 상품권의 주요 용도는 뇌물(접대비) 혹은 ‘깡’”이라며 “회사들이 상품권의 지출대장을 구비하고 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세법상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입하면 지출 사용처에 대한 증빙 없이 매입 증명자료와 상품권 지출대장만으로도 비용처리가 가능하다.

2014년 국세청은 제약회사 100여곳에 법인카드로 구매한 상품권의 사용처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의사·약사들에게 불법 리베이트 목적으로 건넨 상품권 규모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방산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군 장성들을 상대로 한 로비에 상품권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태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간사는 “경실련이 자체 분석한 결과 10만원권 이상의 고액상품권이 2015년에만도 5조원 이상 발행된 것으로 파악됐다”며 “법인이 상품권을 접대비로 경비처리할 경우 구체적인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돼 음성적 거래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품권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탈과 범죄의 신종 지불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경찰에 따르면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 자신의 음란사진과 영상을 휴대폰으로 전송하거나 성매매의 대가로 문화상품권, 이른바 ‘문상’을 주고받기도 하는 실정이다.

상품권 유통시장이 이처럼 편법과 탈법에 악용되는 등 변질되고 있지만 정부는 상품권 관리는 물론 정확한 시장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99년 상품권법이 사라지면서 상품권 발행에 제약이 없어졌고 이를 관리하는 주무부처도 지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종상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상품권이 법인의 불법 리베이트, 공금 횡령, 비자금 확보 등 범죄에 악용될 수 있지만 정책적 대응은 미흡하다”며 “고액상품권 발행등록을 의무화하고 기본적인 자금세탁 방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동효기자 kdhy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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