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제조업체인 우양통상의 베트남 생산라인. /연합뉴스
“고용 유연화나 규제 개혁은 감감무소식이고, 통상임금까지 늘게 생겼으니 참 기업 하기 힘드네요. 사업을 접고 해외로 나가야 하는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의 1심 선고가 전해진 31일. 한 중견 정보기술(IT) 부품업체 대표는 한숨부터 쉬었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 기본적으로 비용·시장·규제 등을 따져 최적의 장소를 골라 생산기지를 정하는 것”이라며 “이제는 정말 밖에서 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경영악화에 울고 싶은 기업의 뺨을 때린 격이 될까. 이번 통상임금 판결이 기업들의 해외 이탈을 촉발하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될 조짐이다. 당장 이번 판결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는 자동차 업계는 벌집 쑤셔 놓은 분위기다. 최근 철수설로 시끄러운 한국GM을 비롯해 고비용에 멍든 완성차 및 부품 업체들은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8월 현대·기아 등 완성차 5개사의 모임인 자동차산업협회는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할 경우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들은 “우리나라 완성차업체의 평균 임금이 세계 최고수준이며 소형차 위주로 생산하고 있어 부가가치가 높은 차를 만드는 선진국보다 인건비 부담이 더 크다”고 항변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업체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12% 이상으로 제조업의 정상적 경영지표 한계선인 10%를 넘어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만약 완성차업체 중 하나라도 국내를 떠나게 되면 협력업체 등의 연쇄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GM만 해도 철수 시 과거 쌍용차 사태의 10배 이상의 충격파가 발생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내에 남아 있던 섬유업체의 해외 이전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경방이 최저임금 인상 등을 이유로 광주 면사공장 일부를 베트남으로 옮기기로 한 데 이어 전방도 국내 섬유공장 6곳 중 3곳을 폐쇄하는 등의 구조조정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개혁’ 대상으로 전락한 기업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들은 통상임금 소송 이전부터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 등의 조치로 핀치로 몰리던 터였다. 그만큼 이번 통상임금 판결은 기업에 뼈아플 수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노조가 생산성 대비 과도한 보상을 받고 그 여파로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며 “법적·정치적으로 고임금 체계를 해결하지 못하면 생산라인을 해외로 옮기려는 시도는 갈수록 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도 “정부나 법원이 최저임금 인상, 통상임금 확대 등으로 기업 부담을 늘리면서도, ‘해외이전’ 등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는 이중성을 이해할 수 없다”며 “기업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되레 윽박지르는 현실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 대기업의 해외투자는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지난 2월 삼성디스플레이가 베트남에 25억달러를 들여 모바일용 디스플레이 패널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고 6월에는 현대차그룹이 미국 생산시설 등에 31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달리 말하면 국내 일자리가 그만큼 준다는 의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빠져나간 투자 규모만도 352억달러(약 40조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통상임금 판결이 물밑에서 들끓던 기업의 ‘해외 엑소더스’ 욕구를 폭발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대기업 임원은 “한때 저렴한 생산비를 쫓아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겼던 일본 기업들도 이제는 법인세 인하, 규제 개혁, 엔저 등으로 다시 국내로 유턴하고 있다”며 “원가 절감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국내 제조업체들의 순유출 규모만 줄여도 일자리를 크게 늘릴 수 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