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전기 시대가 열리다



1882년 9월 4일 오후 3시,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모건 하우스. 투자자 대표인 J.P.모건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긴장 어린 정적을 누군가 깼다. ‘일이 안되면 벌금 100달러 내는 겁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좋소’라고 받아넘기며 스위치를 올렸다. 순간 불이 들어왔다. 사무실 책상의 스탠드며 응접실 상들리에 까지 빛을 뿜어냈다. 모건 하우스 안의 100여 개 백열전등이 한꺼번에 빛을 내자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주변 67개 건물에서도 300개 전등이 켜졌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중앙집중 공급식 상업용 발전이 시작된 순간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것도 바로 이때다.

에디슨은 단순히 백열전구만 발명한 게 아니라 조명 시스템 전부를 새로 만들어냈다. 석탄을 때서 전력을 생산하는 증기기관이 설치된 발전소를 짓고, 가정이나 회사에서 전등을 사용할 가입자를 모집하며 뉴욕시 의회로부터 각종 공사 허가를 받아냈다. 도로를 파헤쳐 전기를 보내는 전선을 땅속에 묻고 백열전구와 전선을 비롯해 퓨즈·계량기·스위치 등을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해 모든 제품을 직접 만들었다. 발전소에 들어가는 증기기관이 보다 많은 출력을 낼 수 있도록 개량하는 작업까지 맡았다.
뉴욕 맨해튼 펄 스트리트에 에디슨이 세운 최초의 발전소이자 에디슨 전등회사 본사.
평생(1847~1931) 2,332개 특허를 등록한 에디슨이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꼽는 백열전구를 발명한 시기는 1878년.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고 바로 ‘에디슨 전등회사(Edison Electric Light)’를 세웠다. 단순한 발명에 그치지 않고 에디슨은 사업화를 꾀했다. 발명가로서 명성과 다양한 홍보 전략을 구사하며 월가와 산업계의 큰 손들을 투자자로 끌어모았다. 연구와 자금이 투입된 결과 에디슨이 1876년 세운 세계 최초의 산업연구소였던 뉴저지주 멘로파크 연구소에는 1879년 말부터 연구소에 25개, 사무실 8개에 백열전등이 설치돼 밤을 낮처럼 밝혔다.

백열전등에는 뉴욕 월가에 처음 설치되기 이전부터 관심이 쏠렸었다. 멘로파크 연구소의 조명 시스템을 견학하기 위해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찾아올 정도였다. 1880년에는 에디슨 전등회사의 주주인 헨리 빌라드가 건조한 신형 증기 여객선 ‘컬럼비아호(3,721t)’에 전등 설비를 깔았다. 동력원인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상용 조명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에디슨은 전구 소켓, 스위치, 퓨즈도 새로 고안해냈다. 컬럼비아호 조명 시스템으로 자신을 얻은 에디슨은 멘로파크 연구소 주변에 약 13㎞의 지중선(地中線)을 깔고 교차로와 도로를 따라 백열전구 가로등을 심었다.

마침 설치가 완료된 바로 다음날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에디슨은 당선을 축하한다며 가로등의 불을 밝혔다.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해 새로운 투자자들이 에디슨을 찾았다. 기존 투자자들은 연구비만 가져갈 뿐 전력 생산이 지연되는 에디슨에게 더욱 많은 돈을 냈다. 1881년 2월 멘로파크 연구소를 뉴욕 맨해튼 한복판으로 옮긴 에디슨은 가스등 2만 개를 사용하는 1,500여 기관과 법인, 개인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마침내 연구소 이전 20개월 만에 전력 공급이 성공한 뒤 에디슨 전등회사에는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에디슨 특유의 언론 홍보 전략으로 주요 언론은 호의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모건 하우스를 비롯한 월가에 전기가 처음 공급된 날 뉴욕 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전등은 밝고 안정적이었다. 각각의 램프(전등)는 약간씩 열이 났지만 가스등보다는 훨씬 덜했다. 백열전등의 빛은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두통을 가져오는 깜빡거림과 가스 알갱이도 없었다. 가스등과 비교하라면 에디슨 전등은 말할 나위 없이 모든 이의 찬성을 얻을 것이다.’ 다음날 에디슨의 회사에는 전등 2,000여 개 주문이 들어왔다. 1884년까지 뉴욕 맨해튼의 에디슨 백열전구 사용량은 1만 164개로 늘어났다.


그을음도 소음도 없이 밤새 일정한 빛을 내는 백열전등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디슨의 자가발전 설비로 움직이던 미국 각지의 유명 호텔들도 중앙공급식 발전에 관심을 보였다. 전기 사업으로 세상의 밤을 밝힌 에디슨은 떼돈을 벌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돈방석에 오르기는커녕 돈만 까먹었다. 전력 소비지 근처에 발전소를 세워야 하는 직류발전의 특성 탓이다. 1882년 말 에디슨은 2,300여 개의 백열전등을 켜기 위해 중소형 발전소 85개를 지었다. 돈이 끝없이 들어가자 투자자들도 차츰 의구심을 품었다.

틈을 파고든 것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발전 방식. 고압의 전류를 생산, 송전한 뒤 소비지역에서 변압기를 통해 전압을 낮춰 사용하는 교류발전은 장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석탄이나 용수 공급이 용이한 곳이면 어디든지 대형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발전단가도 싸졌다. ‘전기 전쟁’에서 이기려고 에디슨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사형용 전기의자가 등장한 것도 고압 교류전력의 위험을 알리려는 에디슨의 로비가 먹혔기 때문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살인집단’이라는 에디슨의 흑색선전에도 교류 발전의 우수성이 부각되고 웨스팅하우스는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년 개최)의 전기공급권까지 따냈다.

에디슨의 직류 발전이 교류 발전 방식에 밀리자 자본가들이 움직였다. 에디슨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J.P. 모건 등은 에디슨 전등회사를 다른 회사와 합병해 대형 전기회사로 만들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인 제너럴 일렉스릭(GE)이 이런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 GE의 주식 5%를 얻은 에디슨은 이때부터 전기사업에서 멀어졌으나 미국의 전력산업은 웨스팅하우스와 GE 간 경쟁과 협력을 통해 눈부시게 커 나갔다. 현대 산업사회를 이끈 전력산업에는 발명가의 창의력뿐 아니라 효율성과 시장선점을 위한 기업 간 경쟁, 그리고 협력이 깔려 있는 셈이다.

에디슨은 이때를 정점으로 산업계는 물론 발명계에서 점점 명성을 잃었다. 말년에는 퇴물 대접을 받았다. 한때 멘로파크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니콜라 테슬라 등 경쟁자들과 인간적인 관계도 틀어졌다. 에디슨에 대해서는 갈수록 여러 평가가 나오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기업들이 연구라는 개념도 모를 때 개인의 힘으로 전문연구소를 설립해 집단지성의 힘을 이끌어내며 현대 전기 시대를 활짝 열었다. 오늘날의 전기 생산과 송전도 기본적으로는 에디슨의 중앙공급 방식과 동일하다.

에디슨이 최초로 중앙 공급식 전기발전을 시작한 9월 4일은 우리와도 관련이 있다. 조선의 경복궁에 가설될 전등 설비가 에디슨에 발주된 게 1884년 9월 4일. 한미 수교(1882년) 이듬해인 1883년 조선 최초로 서구에 파견된 외교 사절인 보빙사(報聘使)의 미국 방문 보고를 접한 고종은 발주를 서둘렀다. 갑신정변으로 수입에 차질을 빚어 2년 지연됐어도 1887년 3월 경복궁에 발전 설비가 들어왔다. 에디슨이 중앙집중 공급식 상업 발전을 시작한 지 4년 반에 조선에 상륙한 이 시설은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중국은 물론 일본보다도 2년 앞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고종이 거금을 들여 조명 설비를 구비한 이유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임금은 병란이 두려워 언제든지 피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가마꾼 20명을 대기시키고, 밤을 이용한 소요가 많이 발생하므로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령했다.’ 1889년 개통된 한성 시내의 전차 역시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던 청량리 홍릉(1919년 경기도 남양주로 이릉)으로 잦은 능행의 편의가 주목적이었다. 한성부의 시내 전차는 도쿄보다 3년 빨라 아시아 최초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교토보다는 4년 늦다.

조선은 한정된 예산으로 무리하게 도입한 조명 시설에 대한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발전기의 증기기관을 식히려 경복궁 향원정 연못의 물을 사용하는 통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 ‘증어망국(蒸魚亡國·물고기가 삶아지고 나라가 망한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전깃불이 묘하다고 묘화(妙火), 괴상하다며 괴화(怪火)라고도 불렸다. 등불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 반복한다는 뜻에서 ‘건달불(乾達火)’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밤을 두려워했다던 고종은 궁궐을 훤히 밝혔지만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조선의 등불을 꺼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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