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고별 강연회를 마지막으로 이화여대를 퇴임한 신화학자 정재서(사진) 명예교수는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적 상상력의 확산과 대중화를 위해서는 박물관·아카데미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지식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정 교수는 문화부가 주최하는 ‘찾아가는 직장인 인문학’ 프로그램의 연사로 나서는 등 대중강연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오는 13일 서울도서관에서 열리는 ‘내 인생으로의 출근-퇴근길 인문학’ 세번째 강연자로 나설 예정이다. ‘퇴근길 인문학’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도서관과 공동 주최하고 서울시가 후원하는 무료 강연회로 직장인들이 숨 가쁘게 살아온 삶을 성찰하고 인문학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쉼표 같은 인문학 콘서트다.
상상력의 원천인 신화는 사유의 원형(archetype)이자 인류의 원초적 욕망이 담겨 있는 오래된 종교이자 이야기다. 정 교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한 서양문명은 사피엔스 중심의 순혈주의 문명을 이뤘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인간과 사물과 기계가 공존하면서 교감해야 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대다. 융복합 시대의 상징은 동양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천지개벽 전에 등장하는 혼돈의 신 제강(帝江)은 날개 넷, 다리 여섯에 얼굴이 없는 새의 형상이고 인류의 선조인 복희와 여와는 하체가 뱀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로마신화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고대 동양신화의 염제(炎帝) 신농(神農)을 예로 들어 좀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스로마신화에는 반인반수는 불완전한 존재 혹은 괴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동양신화에서는 인간을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고대 동양에서는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자연을 경외하면서 자연에 가까운 동물을 인간보다 더 신성하게 여겨 신화에서는 성스러운 신이 동물의 몸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해리포터가 그리스로마신화와 성경 등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산물이며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신화가 모태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이후 미래의 산업에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기업들은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는 “증강현실로 주목받았던 닌텐도의 포켓몬고 캐릭터는 일본의 민담 속 요괴가 그 원형이며 일본의 민담은 동양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서 “그리스로마신화에 이어 북유럽신화를 바탕으로 한 현재의 문화산업을 뛰어넘으려면 동양신화를 알고 그 속에서 상상력을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동양신화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그동안 학자로서 연구해온 성과의 대중화에 나섰다. 지난 2004년 처음 출간한 ‘이야기 동양신화(김영사)’의 개정판 출간에 이어 곧 동양의 신화를 주제로 한 만화도 제작 단계에 들어간다. 하지만 개인적인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는 “정부 차원에서 신화 박물관을 설립해 그동안 학술적으로 연구해온 성과를 예술과 접목하는 등 다양한 형식의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알리고 연구소 혹은 아카데미 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많은 사람들이 동양 신화와 관련된 지식을 흡수하고 재생산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면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동아시아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내 인생으로의 출근-퇴근길 인문학’은 2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7시 서울도서관 1층 생각마루와 4층 사서교육장에서 번갈아가면서 진행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도서관 정보서비스과(02-2133-0242)로 문의하면 된다. /글·사진=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