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美정부 '수동적 관찰자' 역할 유감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레이건 시대 수동적 정부 매몰
계층 간 불평등 최대 수준 도달
기후변화 대비도 계속 눈감아
허리케인 '어마' 등 피해 못줄여

파리드 자카리아
허리케인 ‘하비’와 ‘어마’, 서부지역 산불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켜보면서 우리 삶에서 정부가 담당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재지변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정부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하지만 그에 앞서 정부가 대비조치를 취해 위기를 완화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눈을 감는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은 정부가 문제의 원천이라는 이념적 틀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당시 레이건은 “영어에서 가장 무서운 아홉 마디의 말은 ‘정부기관에서 나온 공무원입니다. 도움을 드리려 이곳에 왔습니다’일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이건은 활동가적 국가(activist state)라는 환상을 벗어던지고 국가방위와 같은 핵심기능으로 정부 역할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방위 이외 영역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란 민간 부문과 시장의 힘을 격려하는 것이 전부라고 레이건은 믿었다.

그의 세계관은 잘못된 국가재정 관리,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저성장 등으로 점철된 시기였던 1970년대에 자라났다. 당시로서는 아마도 올바른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과거와 판이한 도전에 직면한 채 활동가적 정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음에도 레이건 시대의 경직된 이념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공화·민주 양당 모두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197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의 전체 노동자 중 90%의 임금이 제자리걸음을 한 반면 슈퍼 부유층의 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이로 인한 계층 간 불평등의 격차는 도금시대(19세기 후반 미 자본주의 성장기) 이후 최대폭으로 벌어졌다. 또 점차 확대되는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이 서방의 시장과 자본을 최대한 활용하며 다른 한편으로 국내 경제를 엄격히 통제하고 억압적 무역관행을 추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보호무역으로 간주했기에 미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금융기관들은 동전 앞면이 나오면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지는 실질적 노름판의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타인 돈을 이용한 머니게임의 위험수위를 한껏 높였다. 규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만 해도 사회주의자로 몰리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초래하며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 후에도 정부 규제는 명백한 잘못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금융 부문 규제를 해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대두됐다.

같은 시기 폭발적 성장을 이룬 테크놀로지 업체들은 선점자의 우위(first-mover advantage)를 십분 활용하면서 확고한 유사 독점 및 유사 경쟁체제를 만들어냈다.

디지털 경제 시스템에서는 개인 기업가에게 힘이 실릴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와 달리 4~5개 거대기업들이 글로벌 첨단산업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오늘날 새내기 테크놀로지사들의 최대 열망은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매각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새 경제를 형성하는 데 연방정부의 역할이 전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연방정부의 개입은 활동가적이고 그것은 나쁘기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마치 새로운 넷플릭스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처럼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기후문제도 그렇다. 허리케인 ‘하비’와 ‘어마’가 지구온난화로 발생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허리케인의 빈도와 강도가 기후변화로 확대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난 20년간 엄청난 피해를 낸 초대형 태풍 20개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전의 40년 동안 발생한 허리케인 건수와 거의 비슷하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올해 5,000건에 가까운 산불이 발생했고 지난 20년 중 17년이 기온관측 개시 이래 가장 무더웠던 해로 기록됐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의 행동주의를 지나치게 경계했다. 기후변화 대응뿐 아니라 태풍의 파괴력을 키우는 데 기여한 다른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휴스턴은 상습 침수위험지대에조차 개발제한 구역을 두지 않았고 빗물을 흡수해 침수를 막아주는 수천 에이커의 습지를 포장했다. 화공업계는 워싱턴을 상대로 로비를 벌여 느슨한 규제를 이끌어냈고 그 결과 화재와 오염에 대한 보호조치가 크게 제한됐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이들이 초래한 결과를 뚜렷이 목격했다. 그리고 낮은 세금과 느슨한 규제를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텍사스는 지금 연방정부에 피해복구 및 재건비용으로 1,500억달러 이상의 지원금을 구걸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자연과 인간의 혁명시대에 살고 있다. 격동의 시기는 이런 추세와 힘의 수동적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정부를 필요로 한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통사람은 무력해진다. 내 생각으로는 이번 주 텍사스와 플로리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많은 주민은 “정부 기관에서 나온 공무원입니다. 도움을 드리려 이곳에 왔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뻐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