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위대한 유산]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문·철·과'가 파헤치다

■조대호·김응빈·서홍원 지음, 아르테 펴냄
동물 가운데선 '최선'이지만
법·정의 일탈할 땐 '최악' 전락
진화론 과학적 근거 부정 않고
창조론 종교적 믿음 존중 통해
생명 신비에 겸허한 자세 강조
연세대 교수 3인 명강의 엮어



모든 물건은 분명한 목적을 안고 만들어진다. 연필은 필기를 위해, 세탁기는 빨래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다르다. 목적 없이 어느 날 세상에 툭 던져진 인간은 끊임없이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고 찬란한 앞날을 설계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아이덴티티’를 다듬어 나가는 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철학의 소관이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실증적 규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과학의 영역에도 어김없이 포개진다.

‘위대한 유산’은 철학과 과학의 광활한 울타리를 종횡무진 누비며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는 책이다. 조대호·김응빈·서홍원 등 3인의 저자는 모두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학자들이다. 전공은 철학·생물학·영문학 등으로 제각각 다르지만 이들은 ‘인문 정신이 결여된 과학기술은 공허하고 과학에 무지한 인문학은 관념적 사변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공감했다. 이후 2010년부터 올해 1학기까지 7년 동안 하나의 과목을 3인의 교수가 번갈아 강의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매년 4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몰리면서 이 수업은 연세대 최고의 명강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위대한 유산’은 수업 내용을 그대로 보존한 채 무대만 강단에서 지면으로 옮겨와 만든 책이다. 저자들을 한데 뭉치게 한 초심(初心)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시종일관 ‘공존’과 ‘이해’의 테마를 두 바퀴 삼아 굴러간다.


저자들은 ‘시학’, ‘정치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동물부분론’을 언급하며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관심 분야였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논쟁을 이제는 끝내자는 제안을 건네기도 한다. 명백한 과학이론인 진화론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으며 과학이라는 잣대로 타인의 종교적 믿음을 비웃는 행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현 정부 인사 논란의 한 복판에 섰던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와 관련한 새로운 통찰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과학자인 그는 “진화론을 존중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창조론도 믿는다”고 밝히면서 지명 초기부터 야당의 공세에 시달린 끝에 자진 사퇴했다.

공존과 이해를 작품 테마의 축으로 세운 저자들은 생명의 신비 앞에 겸허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역설하기도 한다. 이 책이 ‘인간이란 완전해질 때에는 모든 동물 가운데 최선이지만, 법과 정의로부터 일탈할 때에는 최악’이라고 말할 때 읽는 이의 마음은 도리 없이 숙연해진다.

흠결도 없진 않다. 책 후반부에는 치명적 유전병 차단을 목적으로 개발된 ‘착상 전 유전자 진단법(PGD)’ 기술이 아이의 성별을 미리 확인해 출산을 결정하는 용도로 변질된 사례가 등장한다. 철학자와 과학자가 힘을 모아 이 윤리적 딜레마를 파고들 법도 한데 간략히 훑는 선에서 멈추고 만다. 영혼의 윤회설(說), 기독교 신앙 얘기가 앞뒤에 중복되는 것도 사소한 시비거리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책에 수록된 시 한 토막을 소개한다. 나의 뿌리가 궁금해 머리를 쥐어뜯다가도 불가해한 인생의 한 단면을 수용하며 이내 삶의 긍정에 이르는 이 시만큼 멋들어진 마무리가 또 있을까 싶다. 17세기 독일의 종교 시인이었던 앙겔루스 실레시우스가 남긴 노래다. ‘나는 존재하나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나는 왔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가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유쾌하게 산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1만8,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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