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 "화랑은 장사 아닌 사업이라 생각...경매회사 세워 신시장 뚫었죠"

이 호 재 서울옥션·가나아트갤러리 회장
서른살에 가나화랑 문 열고
화랑업 처음으로 법인등록
90년 미술시장 침체 보고
첫 경매사 '서울옥션' 설립
돈 되겠다 싶어 한 일보다
가치있는 일 한게 좋은 결과
화랑업 아직 법의 사각지대에
稅 혜택 등 정책적 지원 절실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권욱기자
미술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몇 가지 편견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큐레이터는 화려한 외모와 이지적 말투를 가진 젊은 여성, 갤러리 대표나 미술관 관장은 고가의 명품이 잘 어울리는 우아한 중년 부인, 그림 거래자금은 검은돈이라는 식의 왜곡된 선입견 말이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가 화랑 사장이라고?” 지난 1983년 ‘가나 화랑’을 연 서른 살의 이호재는 결국 명함 속 직함을 대표 대신 상무로 고쳐 쓴 채 해를 넘겨야 했다. 당시 화랑가 밀집지역이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일대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갤러리 대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호재(63) 서울옥션·가나아트갤러리 회장은 국내 화랑 최초로 전속작가 제도를 도입하고 세잔·모네·르누아르 등 해외 미술 거장의 전시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며 발자취를 남겼다. 1995년 ‘가나 보브루’로 프랑스 파리에 진출해 현지의 동양 갤러리로는 처음으로 현대미술을 취급했고 한국 미술가를 위한 파리 아틀리에 ‘소나무’ 설립을 지원했으며 파리의 미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인 ‘시테(CITE)’에 한국 작가 공간을 조성했다. 1998년에는 국내 첫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을 설립했고 2008년에는 서울옥션 홍콩법인 설립과 함께 코스닥시장에 진출했다. 전 세계 미술품 경매사 중 상장사는 미국 소더비즈, 중국 폴리컬처, 일본 시나옥션 정도다. 2014년 미술계 공익사업을 위해 가나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화상(畵商)’에서 ‘예술 후원자’로 거듭난 그가 오는 26일 독일 만년필 브랜드 몽블랑이 운영하는 ‘2017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에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로 찾아갔다.

수두룩하게 따라붙는 ‘최초’라는 수식어, 국내 최정상급 갤러리의 창업자, 2015년에는 연매출 1,000억원을 넘긴 서울옥션의 회장이지만 그는 상상 이상으로 소탈했다. 약간 처진 듯 순해 보이는 눈은 오수환 작가의 그림을 걸 때, 가구 디자이너 피에르 잔느레의 의자를 움직일 때, 그러니까 작품을 대하는 순간에만 딴사람처럼 예리하게 반짝이고는 했다.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권욱기자
이 회장과 미술계의 인연은 순전히 우연에서 시작됐다. 군 복무 중 다시 만난 경복고 동창 염기설 예원화랑 대표가 같이 일해보자고 친구들과 ‘고려화랑’을 차리고 일을 시작한 게 1978년. 그때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부친이 골동에 관심 있던 것 말고는 미술과 큰 인연은 없었어요. 다만 운은 좋았죠. 당시 개관을 준비하던 호암미술관에 작품을 공급했습니다. 1982년 3월에 미술관이 문을 열자 더 이상 작품 수집을 안 하는 것으로 오인해 고려화랑을 해체하기로 했는데 친구와의 경쟁을 피하고자 택한 게 해외 미술이었죠.”

1,999달러짜리 북반구 일주 왕복 항공권을 들고 무작정 파리로 간 그의 눈에 띈 것은 거장의 명작들뿐 아니라 탄탄하면서도 투명한 서구 미술 시장의 시스템이었다. 가나화랑을 창업하면서 개인사업이 아니라 법인으로 등록한 것도 “미술계라는 곳이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폐쇄적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데이터화·투명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개인이나 법인이나 마찬가지지만 ‘장사’가 아닌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야외조각공원이던 장흥아트파크에 100여개의 작가 작업실을 마련하고 10년 가까이 지속된 시장 침체의 늪에서 경매회사를 설립하는 등 과감한 도전에 나선 것은 배짱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택한 덕분이었다. 물론 혜안도 있었지만 욕심을 낸 것은 아니다. “걸프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89년 봄부터 외국 미술 시장이 가라앉았는데 우리는 1년가량 늦었고 이후 시장 침체가 이어지며 작품값이 구입가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화랑은 되팔아줄 여력이 없어 고객을 피하게 되고, 고객은 시장에 대해 실망하던 때였어요. 어떻게든 유통이 가능한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공개경매로 거래하면 그 시장원리에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수긍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아트 상품과 디자인 상품을 공급하는 가나아트숍과 판화 공방을 연 것도 고가 작품의 거래가 어려우니 낮은 가격으로 거래가 이뤄지게 해 작가들에게 고정적인 수입이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이 떠올랐는지 잠시 숨을 고른 이 회장은 “내가 주저앉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추게 되니 어려울 때일수록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뭔가를 해야만 했다”면서 “돈 되겠다 싶어 시작한 일보다는 필요하고 미술계에 가치 있는 일에 먼저 투자한 게 종국에는 좋은 일이 됐다”고 회고했다.

지난 5년여 동안 글로벌 아트마켓의 주목을 끈 1970년대 한국미술 ‘단색화’에 이어 새로운 블루칩으로 떠오른 1980년대 ‘민중미술’도 마찬가지다. 정치·사회적 배경과 시대 상황이 그림 곳곳에 밴 민중미술이 시장에서 거래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던 그 시절, 이 회장은 민중미술 작품을 사 모았고 관련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가치판단의 기준은 ‘돈’이 아닌 ‘의미’였고 이는 그림 투자에도 딱 들어맞는 불문율이다.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권욱기자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1980년대 미술은 사회적 격동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미술이자 유일한 자생적 미술입니다. 거친 듯하지만 그래서 남들과 구분이 가능한 것이죠. 상품성은 중요하지 않았고 분명 미술사적으로, 언젠가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작품을 정치색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람(작가)이 아닌 작품 그 자체만 본다면 ‘가장 솔직한 미술’로 충분한 가치를 갖습니다. 임옥상·신학철·황재형의 그림값이 이렇게 오를지, 오윤의 판화가 비싼 값에 팔릴 날이 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민중미술은 20년 만에 수십 배씩 값이 올랐고 최근 들어 ‘포스트 단색화’로 지목되며 또다시 상승기류에 올라탔다. 그러나 이 회장은 ‘살 때 큰돈 안 들였고 흩어지면 의미 없을 컬렉션이라 작품 연구를 바라며 수집한’ 작품 200여 점 전체를 2001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가 가나문화재단을 만들어 박수근·장욱진·이응노 회고전, 한국적 리얼리즘 기획전 등을 개최한 이유도 명확했다. 이 회장은 “재단을 만들어 건물이 거창한 미술관을 지으려는 게 아니라 미술계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자료와 기록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라며 “국내 화랑업이 1세대 창업주에서 2세대로 넘어가면서 내가 할 일은 재조명이 필요한 작가, 미술계의 장인들, 상품화되지 않은 미술품의 가치를 발굴하고 자료화하는 일이란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초의 고미술상 우당 홍기대의 회고록, 1세대 표구사 중 대표 격인 낙원표구사의 이효우 사장 회고록 등은 시장성을 초월한 가치가 있고 자료화할 필요가 있다”며 “자료와 기록문화가 정착되면 사람들이 섣부르게 살 수 없고 책임지는 행동을 하게 되니 이것이 미술 시장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30년 이상 미술 시장을 지켜봤고 파리·뉴욕·홍콩 등지에서 넓게 봐온 그에게 한국 미술계의 발전을 위한 쓴소리를 부탁했다. “전시장 대관료를 내기 힘든 공예작가들에게 임대료를 깎아준 것이 증여로 파악돼 세금을 더 내고, 백남준 작품을 텔레비전으로 판단해 전파법에 따른 세금을 냈고, 해외에 있던 우리 문화재를 들여오면서 부가세를 내는 등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화랑업입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반면 문화정책이 외려 문화 소비를 위축시키지는 않는지 정교하게 판단해서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싱가포르·홍콩·상하이는 프리존(무역 및 세금 자유지역)이 조성돼 미술뿐 아니라 문화 시장이 급성장했죠. 문화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유통과 거래의 길을 터주고 소비 촉진을 일으켜야 합니다. 제주나 인천 등지에 예술자유지역을 설정해 수장고도 짓고 전시장이나 쇼룸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앞날을 얘기하는 이 회장의 눈에서 그 옛날 젊은 사장의 패기가 또 한번 보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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