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15일 스코틀랜드 최북단 군항 인버고든(Invergordon). 기동훈련을 위해 새벽에 출항하려던 영국 대서양 함대가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주요 전함의 수병들이 훈련을 거부하며 파업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 사상 초유인 해군 파업의 원인은 임금 삭감. 세계가 대공황을 앓는 와중에 영국 정부는 공무원 급여를 줄이며 군인들의 봉급도 평균 10% 깎았다. 문제는 불평등 삭감. 장교보다 수병들의 삭감 폭이 훨씬 컸다. 영관급 3.7%, 위관급은 11.8%를 깎이는 반면 고참 수병은 최고 25%를 삭감당한다는 소식에 병사들이 들끓었다. 함정 내 헌병 역할을 하던 해병대원들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전함 로드니와 후드, 발리언트, 넬슨의 수병들은 출동 명령을 거부한 채 함내 안전 순찰과 청소 등을 제외한 모든 임무에서 손을 놓았다. 대신 함수 갑판에 모여 집권당인 노동당을 성토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부 병사들은 술판까지 벌였다. 함대 기함인 순양전함 후드의 장교들은 출항을 시도했으나 병사들이 강제로 막았다. 병원 입원 중인 함대 사령관을 대행해 사령관 대리직을 맡고 있던 윌프레드 톰킨슨 제독은 일단 훈련을 취소하고 해군성에 급보를 올렸다. ‘수병들이 25% 삭감안에 분노하고 있지만 10% 일률 삭감안은 수용할 것 같으며 강력한 응징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군성은 톰킨슨의 건의와 달리 강경 진압을 염두에 뒀으나 오후 들어 방침을 바꿨다. 사태를 관망 중이던 함정들의 수병은 물론, 파업에 참여하지 않던 부사관들도 술렁거린다는 추가 보고에 ‘10% 일률 삭감’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수병들은 해군성의 양보안이 나오자 즉각 업무에 복귀했다. 총톤수 35만t이 넘는 15척의 함정이 16일 저녁 기동훈련을 위해 항구를 떠났다. 영국 해군은 이 사건에 ‘인버고든 뮤터니(Invergordon Mutiny)’로 기억한다. 폭력 사태나 약탈, 상관 폭행 등이 전혀 없이 평화롭게 진행된 항명 또는 파업에 폭동이나 선상 반란이라는 뜻의 ‘mutiny’로 규정한 게 다소 의아하다. 군의 파업이란 있을 수 없고 차라리 반란이 낫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1파운드의 가치가 4.86달러에서 3.75달러로 급락하고 금 인출 소동이 일었다. 마침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주가 대폭락으로 세계가 공황으로 빠져들던 시절, 달러와 함께 양대 기축 통화인 영국 파운드화의 초약세는 가뜩이나 불안한 세계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미국과 프랑스 같은 전승국은 물론 패전 독일까지 런던 시장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웨덴과 덴마크 등 작은 나라들도 영국 파운드화를 내던지고 금이나 달러를 사들였다.
견디다 못한 영국 정부는 결국 9월 21일 ‘금본위제도 포기’를 선언했다. 영국의 조치에 24개국이 곧바로 금본위제를 버렸다. 인버고든 항명 사건이 발생할 때 47개국이던 금본위제 채택국은 6년 후 하나도 안 남았다. 세계 경제는 더더욱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제 침체 속에서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독일에서는 극우 보수를 주창하는 나치가 세력을 넓혔다. 지구촌 모든 국가를 괴롭혔던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전시 대량 생산과 대규모 고용이 일어나고야 멈췄다.
인버고든 항명 사태는 전쟁으로 치닫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과정이었지만 시사점을 던져준다. 위기의 순간을 견딜 수 있는 재정을 유지하는 나라가 오늘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의 재정은 탄탄할까. 찰스 킨들버거 같은 경제학자의 평가대로 ‘특정 국가의 위기가 전 세계로 파급되는 사태를 제어할 수 있는 국제 공조와 협력’은 공고한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