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산업부의 숫자놀이



최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내 배터리 제조 기업과 석유화학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의 간담회 자리를 잇달아 가졌다. 배터리 및 석유화학 업계의 목소리를 듣고 앞으로 새 정부가 산업 정책을 수립할 때 이를 고려하겠다는 의도다. 나쁘지 않은 자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두 번의 간담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참석 기업 모두 간담회에 앞서 수조원대의 투자를 약속했고 정부는 이를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배터리 업체들의 경우 간담회 개최 당일 보도자료를 내고 시설투자 2조원, 연구개발(R&D) 6,000억원 등 총 2조6,000억원을 오는 2020년까지 국내에 투자하겠다고 밝혔으며 석유화학 업체들도 충청남도·서산시와 대산 첨단화학특화단지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무려 10조원가량의 투자가 뒤따라올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부가 밝힌 투자 규모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부정확하다는 이유에서다. 예컨대 대산 첨단화학특화단지의 경우 관련 기업은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전혀 잡지 않고 있다. 정부가 10조원이라는 구체적인 투자 규모를 제시했지만 이날 참석한 기업 대표들에게서는 ‘검토 후 결정’이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나왔다. 실제로 한 CEO는 특화단지 투자 내용을 묻는 질문에 “더 자세하게 가봐야 안다.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검토하겠다는 의미다.

LG화학과 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 배터리 3사가 밝힌 시설투자 2조원도 연평균으로 보면 해마다 약 7,000억원, 한 기업당 2,000억원 정도로 이전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정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배터리 업계는 투자금액만 알면 생산용량을 추측할 수 있어 투자액은 대외비”라며 “정부가 협회를 통해 취합한 자료가 얼마나 정확할지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기업들은 대통령이나 장관 등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정부 정책 협조 등의 ‘선물’을 들고 나왔다. 일각에서는 새 정부도 과거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불만이 나온다. 지난해부터 배터리 업계에서는 중국의 고도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과 관련해 정부 대책이 필요함을 제기했지만 정부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청와대에 초청받은 한 대기업 총수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이번 백 장관의 간담회에서도 어김없이 다시 언급됐다는 사실은 이번 간담회 역시 ‘정부의 생색내기’일 뿐이라는 비판에 힘을 실어준다. ‘적폐 청산’을 앞세운 정부라면 기업이 얼마를 투자할지, 혹은 얼마나 투자를 늘릴지와 같이 과거 정부가 했던 ‘숫자놀이’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기업의 애로점이 무엇인지 사전에 취합하고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들고 나왔어야 한다. / 박성호 산업부 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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