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헌책방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군사정변 직후 ‘지도자도(道)’라는 책을 출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나라가 안정되면 위정자에게 정치가의 의무로서 본보기로 (권력을)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해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도 돌았다. 그런데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헌책방이다. 헌책 마니아인 최종규씨는 “이런 책자는 고물상에서 ‘샛장수(중간상인)’가 찾아내 헌책방에 팔아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며 헌책방의 소중함을 설명했다.


헌책방은 보물창고다. 아주 간혹 로또 같은 희귀고서를 찾을 수 있어서가 아니다. 누구는 외면한 책이지만 누구에게는 보물이 될 수 있는 숨은 기록을 찾아내고 잊힌 추억을 소환하는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방랑기’를 쓴 1930년대 일본의 대표 여류작가 하야시 후미꼬가 장사가 안 되는 헌책방을 고집하고 영국 수필가 겸 소설가 조지 기싱이 식사비를 절약한 돈을 손에 쥐고 빵집과 헌책방 앞을 서성이다 결국 헌책방으로 들어간 이유다.

헌책방에는 새 책을 다루는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선물도 기다린다. 책 표지를 넘겼을 때 빈 여백에 살포시 쓰인 메모들이 그것이다. 이틀간 밥을 굶고 돈을 모아 너무 보고 싶었던 책을 샀다는 어느 대학생의 독백, 뜨거운 8월의 태양 아래에서 교련 훈련을 받고 있는 남학생들을 학생회관 서클실에서 바라보던 어느 여학생의 ‘우울한 시선’…. 또박또박 정성스런 손글씨를 보자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기장을 발견한 듯한 착각도 든다.

보물 같은 헌책방이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서울 신촌에 있던 45년 역사의 ‘공씨책방’이 건물주와의 명도소송에서 패해 쫓겨날 처지에 몰렸다. 소송 과정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괘씸죄까지 보태져 상황이 더 심각해진 모양이다. “밀려 밀려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책방 주인의 혼잣말.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하다고 한다. 따뜻한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마시며 주인장과 고객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풍경도 누렇게 색이 바랜 책을 뒤지는 즐거움도 이제는 끝일 수 있다. 길 건너 대형 마트에는 ‘신규 대오픈’이라는 플래카드가 선명하다. /송영규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