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혐의’ 납북어부, 49년만에 무죄 선고

납북어부 3명,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 해
피해자 박 씨 “정부 너무 야속...고향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재심서 반공법 무죄 받은 박춘환(맨 왼쪽)씨와 선원 가족들 /연합뉴스
1968년 조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간첩과 반공법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박춘환(71)씨 등 납북어부 3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장찬 부장판사)는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 1년 6개월과 8개월의 징역살이를 한 박씨 등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1일 밝혔다. 재판부는 “유죄 증거들이 수사단계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 행위로 만들어져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 이유를 설명했다.

‘영창호’ 선원이던 박씨는 1968년 5월 연평도 근해에서 동료 선원들과 납치돼 북한에 4개월간 억류됐다가 1972년 북한을 고무·찬양, 국가기밀을 탐지·수집 등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아 만기 출소했다. 이 사건은 2011년 3월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박씨는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8개월간 옥살이했고 이번에 재심에서 두 번째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 피고인이 두 차례의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10대 시절부터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온 박 씨는 1968년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다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박씨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그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관들이 허위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박 씨에게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가했다. 박씨는 간첩의 멍에를 썼고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결국 박씨는 1980년대 연고가 전혀 없던 충청도로 옮겨갔다. 그는 당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엉덩이뼈와 어깨뼈가 모두 부러졌고 제대로 걸을 수 없지만,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박씨는 “정부가 너무 야속하고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박씨와 함께 납북된 선장 고 오경태 씨의 딸 정애(52)씨는 “어렸을 때 검은 옷을 입은 기관원들이 집 주변을 배회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아팠던 아버지는 항상 누워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무죄 판결을 받으니 오히려 담담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들을 변호한 이명춘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납북어부 1,500여명이 처벌받았는데 지금까지 무죄를 받은 사람은 채 10명이 안 된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임우철 인턴기자 dncjf8450@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