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한보 사태’도 결국 상황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데다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친 게 화를 키웠다. 1996년 당시 재계 14위권이었던 한보철강은 약 60곳에 달하는 금융회사로부터 대출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관리해야 할 감독 당국은 비상벨을 울려보지도 못하고 이듬해 1월 한보 부도 사태를 맞이했다. 감독 당국이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 등 업권별로 쪼개져 있어 누구도 한보철강 전체의 여신 상태를 통합해 들여다보고 관리하지 못했던 탓이다.
정부 대응도 답답했다. 한보에 놀란 재정경제부는 같은 해 4월 금융기관들을 불러 모아 ‘부도유예협약’을 맺도록 종용했다. 은행 여신이 2,500억원 이상인 대기업에 대해 2개월 동안 채권상환 의무를 면제해 부도 시기를 뒤로 미루는 제도였다. 부실기업에 대한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판에 시간 끌기 식 땜질 정책을 선택한 셈이다. 연말 대선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미봉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부도유예협약은 이렇다 할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기아차는 7월 적용 대상이 된 뒤 석 달 만인 10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진로 역시 두 달 만인 9월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해태와 뉴코아·한라그룹 등도 줄줄이 부도를 맞았다.
문제는 최근 상황이 2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는 대선을 앞둔 정치적 상황과 강성 노조 득세 등에 맞물려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위기를 키웠다”며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親)노조 정부가 구조조정의 고삐를 느슨하게 놓으면 위기를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동조선해양·STX조선해양 등 중소 조선사 구조조정이다. 수출입은행은 성동조선에 대한 실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당초 이달 내놓을 계획이었던 보고서 완료 시기를 다음달로 미뤘다. 표면적으로는 향후 수주 물량과 조선업 경기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실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게 수은의 입장이다. 하지만 채권단 내부에서는 실사 결과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큰 것으로 나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실사 보고를 최대한 미루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냉정하고 신속한 판단으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하는데 정치 여건과 같은 외부 환경만 살피다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셈이다. 조선업계에서는 성동조선 구조조정이 곧 중소 조선업계의 생존 마스터플랜인데 너무 시간을 끄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지방선거가 있는 내년 6월은 지나야 구조조정의 윤곽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야 할 정부 내부에서 위기 감각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구조조정 당국 안에서는 올해 상반기 대우조선해양 문제를 일단 마무리 지은 뒤 ‘이제 큰 산은 넘은 것 아니냐’는 인식이 팽배하다. 금호타이어나 성동조선 등은 대우조선에 비해 ‘덩치’가 작아 설령 문제가 생겨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끼리 “서로 구조조정 업무를 맡지 않으려고 해 큰일”이라는 우려도 크다.
하지만 GM대우 철수와 같은 돌발 악재가 아직 물밑에 잠복해 있고 평시가 아닌 위기 상황에서는 작은 변수가 대형 악재로 돌변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국제연구실장은 “지금의 기업 구조조정은 과거와 달리 빚만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장산업으로 재편해야 하는 숙제까지 포함하고 있어 과거보다 더 어려운 과제”라고 말했다.
/서일범·이주원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