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봉 9일째인 12일 현재 336만 여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는 ‘남한산성’의 황동혁(사진) 감독을 서울경제신문이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먼저 그에게 굳이 왜 한국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의 역사를 굳이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이에 황 감독은 “패배의 역사를 통해 희망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원작 소설의 메시지와 힘 있고 깊이 있는 대사 등을 완성도 높은 영화적 기법으로 되살려 내느라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고 했다. “이젠 진이 다 빠진 것 같아요”라고 황 감독은 기자에게 말하며 웃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원작 소설은 성공했지만 패배의 역사를 영화화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소설을 처음 읽는 순간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는데 작품을 읽자마자 영화적인 그림이 한번에 그려졌다.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모두 불 타고 하얗게 재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3년 동안 오로지 ‘남한산성’에만 집중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로 나가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기까지 최명길과 김상헌의 뜨거웠던 설전과 그들 속에 있는 뜨거움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병자호란을 패배의 역사라고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는 서날쇠와 나루가 맞이하는 봄에 주목하길 바란다.
-‘남한산성’을 본 정치인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내놨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딱히 메지시를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웃음) 나라가 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침몰해 가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하기를 바랄 뿐이다. 병자호란 당시 명과 청이 세력을 경쟁하던 시기 조선과 2017년 대한민국의 강대국 사이에서의 역학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명청 교체기 광해군의 등거리외교를 무로 돌리고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이들이 오히려 화친을 주장하는 등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외교 정책을 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부분 아닌가.
-원작자 김훈은 영화에서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인조를 통해서 한 나약한 인간을 봤다. 실패한 아버지든 비굴한 아버지든 비루하지만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 인조의 선택이 백성과 국가를 위한 선택인지 왕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영화는 47일 간의 장례식을 치르는 느낌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장엄한 레퀴엠처럼 들렸다.
△색감이 그럴 수 있다.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와 같이 추위와 고통 속에서 삶을 위해 버텨나가는 사람들을 채도를 배제하고 수묵화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어두운 색의 옷과 눈을 대비해서 진경산수화를 그리듯 말이다. 아주 강렬하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다. 관조적이면서도 차갑게, 문장에서 느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캐스팅만으로도 웰메이드다. 현장에서 만난 배우들에 대해서 말해달라.
△감독의 디렉션으로 갑자기 배우들이 명연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김윤석, 이병헌, 박해일, 고수, 박휘순, 송영창 등 모두 시나리오에 딱 맞는 캐스팅이었고 모두 훌륭했다. 김윤석은 활화산 같은 배우다. 겉보기에는 무서워 보이일 수 있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상헌의 특징이 그에게 있다. 이병헌은 ‘연기하는 알파고’ 같았다. 눈과 고개를 들어야 할 때와 내려야 할 때는 정말 정확하게 알고 들고 올리더라. 놀랐다. 고수가 연기한 날쇠는 천한 신분의 대장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재주가 많고 지혜가 많은 그런 인물이다. 귀 티 나는 고수가 날쇠 역할을 해줬으면 했고, 인조 역의 박해일이 탐내던 역이다. 날쇠 아니면 안 한다고 했고 세 번 만에 응했다. “영화 이야기 안 할 테니 그냥 만나자”해서 만나서 밤새 술을 진탕 마셨다. 그리고 나서 인조를 하겠다고 하더라. 이병헌, 김윤석 사이에서 어려운 연기를 정말 잘 해줬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