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32>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찬바람 부는 날...아이 업은 아낙의 눈엔 그리움이 가득

어머니·할아버지 등 인물상 통해 소박한 일상 담아
가난했지만 마음 넉넉했던 1950~60년대 향수 불러
기름 섞지 않은 물감을 몇번씩 덧바르는 노고 끝에
우둘두둘 화강암 질감 같은 '박수근표 화법' 구현

박수근 1962년작 ‘나무와 두 여인’, 130x89cm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사진제공=현대화랑

고향 다녀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엄마가 보고 싶다. 돌아서면 곧 또 그리운 엄마, 만날 먹어도 질리지 않고 생각나는 집밥의 연장 선상에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이 있다.

나목(裸木) 아래로 젊은 아낙이 아이를 업고 섰다. 그의 눈은 짐을 머리에 인 채 장으로 나가는 여인 쪽, 그 건너편 먼 곳을 응시한다.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눈에는 분명 그리움이 가득하리라. 잎 떨어진 나무 탓인지 찬 바람이 부는 듯하다. 우둘두둘 화강암 같은 질감의 그림 표면 너머로 1950~60년대, 배는 늘 고팠지만 마음만은 넉넉하던 그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이 파고든다.

박수근의 그림은 젊고 감각적인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지긋한 나이에 세상사 갖은 풍파를 겪고 연륜과 지혜가 두툼해진 중년층 이상이 열광한다. 반쯤 돌부처 같아서 웬만한 소리에는 꿈쩍도 않을 것 같은 그 애호가들 중 일부가 ‘손바닥 만한’ 박수근 그림 하나를 갖고자 지갑을 열고 수억 원을 선뜻 지불한다. 지난 시간에 대한 애잔함, 향수에 대한 그리움에 쓰는 비용치고는 상당하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확고하다. 그런 뚝심이 오늘의 근대화, 산업화를 이끌어 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박수근의 그림은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는 2007년 미술품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김환기(1913~1974)에게 그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무려 8년간 미술경매 최고가 기록을 움켜쥐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의 그림은 고가다. 참으로 단순하고 심지어 크기도 작은데 박수근의 그림은 비싸다. 이유는 그 독보적인 한국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박수근 아니면 세상 어디서도 누구도 그리지 않을 풍경이며 표정이기 때문이다.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부친이 농사와 장사를 겸해 일곱살까지는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광산 사업에 실패해 큰 손해를 본 데다 홍수로 논밭까지 물에 잠겨 졸지에 가난을 맞닥뜨리게 된다.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2살의 박수근은 밀레(1814~1875)의 ‘만종’을 보고서 “나는 이다음에 커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정 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박수근은 오로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같은 세대의 화가인 김환기나 이중섭·유영국 등이 유학파 출신인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박수근에게는 자연이 그림 스승이요 감각이 조언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홀로 터득한 그림 기법이 동시대 작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박수근만의 한국적 색깔을 형성했을지 모른다.

18세 되던 해 박수근은 일제시대 전국 규모 미술전이던 조선미술대전(선전)에서 입선했다. 눈 내린 농가에서 빨래 너는 아낙을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라는 그림이었는데 이미 이때부터 박수근의 주제의식은 농촌생활의 풍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화가를 꿈꾸게 한 밀레처럼. 몇 년 뒤인 1936년 선전에서는 아기를 등에 업고 절구질하는 농촌 여성을 그린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선한다. 절구질하는 아낙 역시 박수근이 평생을 두고 그린 소재 중 하나다.

막노동을 해가며 어렵사리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은 아버지가 재혼해 사는 강원도 금성 집에 갔다가 빨래터에서 이웃처녀 김복순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박수근 ‘빨래터’ 1959년작, 50.5x111.5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은 청혼의 편지를 보냈고, 그 아내는 일기 형식으로 이를 적어 남겼다. 실제로 박수근은 평생 다정한 남편이었고 아내를 모델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 ‘빨래터’라는 소재를 즐겨 그린 것도 부부의 연을 만들어준 곳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만삭의 아내를 온종일 맷돌 앞에 앉혀두고 ‘맷돌 돌리는 여인’을 그리던 화가 남편 때문에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로 저리고 빈혈이 왔었다지만 가난 속에서도 아내는 “친정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챙겨주던 남편”이라 추억했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때문에 가족과 몇 번이나 헤어졌다. 1952년에 그린 다섯살짜리 큰아들 성남의 초상화 ‘소년’에는 언제 또 못 보게 될지 모르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붓끝에 눈물처럼 맺혀있다. 이듬해 서울 창신동 집으로 마침내 온 가족이 모이게 되고 그때부터 박수근은 활발하게 작업한다.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도 했는데, 당시 매점에서 일하던 소설가 박완서가 그를 모티프로 ‘나목’을 집필하게 된 인연이 유명하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젖먹이는 아내’ /사진제공=현대화랑

박수근의 그림 소재는 서너 가지가 고작이다. 소재는 늘 일하는 아낙과 모여앉은 소녀, 아이들과 할아버지 아니면 노상 모인 사람들 정도다. 고가의 그림에는 위작이 따르기 마련인데, 수년에 걸쳐 같은 내용을 반복적인 그림을 그린 것도 위작의 빌미가 됐다. 그림의 배경은 거의 없다시피 사라지고 사람들은 눈코입이 희미한 채 무표정에 가깝다.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결과 인물은 구체성을 떨치고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나의 어머니이자 모두의 어머니이며 누구나의 아내로. 어색할 만치 딱딱한 인물상은 ‘이콘화’라 불리는 중세의 성화(聖畵)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순하게 이룬 보편성이 숭고함을 풍긴다. 아이 젖 먹이는 아내를 그린 그림은 언뜻 성모자상으로 보인다.

박수근 그림 특유의 화강암 질감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부터 경주 지역의 마애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거친 표면을 위해 기름 섞지 않은 물감을 몇 번이나 덧바르는 노고를 견뎌야 했다. 그 덕에 그림은 돌에 새긴 듯한 확고함을 입게 됐고 ‘박수근표’의 이름을 갖게 됐다. 한편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젊은 남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 직후 ‘젊은 남자 씨가 말라버린’ 당시 상황이 그랬을 수도 있으나 화가는 피폐한 현실을 다시 일으킬 힘의 근원을 여성들에게서 찾고자 한 듯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지는 강하다는 말처럼.

박수근 ‘강변’, 1964년, 38x89cm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현대화랑

당시 최고급 호텔이던 반도호텔 내 반도화랑을 운영하던 이대원 화백에 따르면 “10호 미만의 작품 20여 점을 걸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박수근의 작품이 한 달에 두어 점씩 팔렸다”고 한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소품에서 벗어나 대작도 그리기 시작했지만 병마가 찾아왔다. 파벌이 극심하던 화단에서 기댈 곳 없이 연거푸 고배를 마시던 그가 과음을 했고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했다. 치료비가 없어 수술이 늦어져 한쪽 눈을 실명하고 어두운 안경을 낀 채 한 눈으로 작업해야 했다. 결국 1965년에 간경화 등으로 세상을 등진다. 생전에 번듯한 개인전 한 번 못 해본 채 말이다.

시력을 잃기도 했지만 박수근이 그린 것은 눈으로 본 것의 묘사가 아니라 마음과 기억이 간직한 풍경이었다. 300점 정도의 작품만을 남긴 그가 몇 가지 주제로 반복적으로 그렸던 대상은 가난과 고통의 시절이 아니라 소박한 일상과 인정 있는 풍경이었다. 정치적 외침은 없었을지언정 그것이 바로 옆에서 본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런 박수근을 ‘나목’의 박완서 뿐 아니라 ‘만인보’의 시인 고은도 예찬했다.

“가난과 순수와 선의가/ 적막/ 나뭇가지 하나도/ 너무 길지 말라/ 나뭇가지 잘라/ 비탈진 동네 가게에서/ 마른 사과 몇알 사가지고 돌아간다…(중략)…이토록 화려할 줄 모르는 예술이/ 오래오래/ 그의 예술을 배반하며/ 화려할 줄이야.”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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