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예술·자연...삼라만상을 성찰하다

10년 맞은 전등사 현대미술제
10년 개근한 오원배 교수 외에
강경구 등 중견작가들도 참여
광화문 세종대왕상으로 유명한
조각가 김영원 교수 불상 제작

전등사 무설전에서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으로 유명한 조각가 김영원의 불상(가운데)과 유럽에서 정통 프레스코기법을 익힌 서양화가 오원배의 후불탱화를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예술가들은 종교를 위해 재능을 헌사했다. 도시와 건물 자체가 보물인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서 방문객이 가장 몰리는 곳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앞이며, 이탈리아 소도시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성당으로 관광객이 향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지오토의 벽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한국 문화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불교는 현대예술을 수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불교미술의 경우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 있어 현대미술이 파고들 새가 없었다. 고구려 소수림왕(381년) 때 창건돼 현존 국내 최고(最古)의 사찰인 전등사가 이를 과감히 깼다. 2008년부터 매년 10월 삼랑성역사문화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현대미술제를 진행한 지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10년간 수집한 예술품이 약 300점에 이른다.

올해 전등사 현대미술제는 ‘성찰’을 주제로 사찰 내 정족산사고 장사각을 특별전시관으로 삼았다. 전등사 회주 장윤스님은 “반성없는 역사는 되풀이 되고, 새로운 역사는 성찰에서 비롯된다”면서 “참여작가들이 우주,인생,예술,자연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을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지난 10년간 이 전시에 모두 참여한 오원배 동국대 교수는 불상의 뒷모습과 인간의 시선, 자연과 우주적 풍경을 교차한 3점 연작을 선보였다. 불상 앞 촛불 그림으로 지난 역사와 개인의 희망까지 압축해 그린 공성훈, 성속을 한 화면에 담아 일상 속 성찰을 이끄는 권여현의 그림 등이 걸렸다. 사찰 위로 떠오른 달을 군더더기 없이 그린 이종구의 ‘대웅보전-전등사’와 원형 LED 설치작품으로 표현한 김기라의 ‘광배-두 개의 둥근 원’ 등은 단순해 보이지만 품은 뜻이 깊다. 강경구·김용철·김진관·이주원·정복수 등 중견작가들이 참여했다.


전등사 정족산 사고 장사각에 현대미술가 공성훈(왼쪽부터), 권여현, 오원배, 김기라 등의 작품이 전시중이다.
전등사와 현대미술의 만남은 무설전(無說殿)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12년 “21세기 시대정신이 담긴 불사(佛事)”를 자랑하며 241㎡ 규모로 신축한 곳이다. 이곳 석가모니불과 보현·문수보살 등 불상은 광화문 세종대왕상으로 유명한 조각가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제작했다. 현대인의 인체 비례를 적용하는 등 기존 불상제작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감각을 더해 인간적이고 친근하면서도 격조 있는 불상이 됐다. 그 뒤 후불탱화는 유럽에서 정통 프레스코 기법을 익힌 오원배 작가가 맡았다. 기독교 종교화가 서양미술사의 전개를 보여주듯 우리 불화의 변천사에도 시대의 변화를 담겠다는 의지가 얹혔다. 기존 불화의 강렬한 색감 대신 벽에 물감을 흡착시킨 색감이나 불제자 군상의 친근한 표정이 보는 사람을 끌어 당긴다. 불교의 정신세계와 정적인 아름다움을 아우르는 공간구성은 이정교 홍익대 공간디자인과 교수가 고안했다.

광화문 세종대왕상으로 유명한 김영원의 불상, 유럽의 정통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한 후불탱화 등이 모셔진 전등사 무설전 내부.
서운스님(1903~1995)을 기리며 ‘서운갤러리’라 이름 붙은 무설전 내 99㎡ 규모 상설 전시공간에서는 노상균·김태호·문범·한만영·강애란·조덕현·문경원 등 쟁쟁한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민정기·서용선·오경환·이만익·임옥상 등 거쳐 간 작가들도 화려하다. 흰 종이에 검은 선으로 그린 설원기의 ‘장미’ 앞에서는 말없이 설파한다는 ‘무설’의 의미가 꽃 가지 하나를 들어 진리를 보여준 염화미소로 피어난다. 불국사 ‘무설전’에서 착안해 이곳의 이름을 짓고 개관 때부터 전시기획을 맡아온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는 “고찰에서도 현대미술을 품어야 한다. 사찰이 전통문화만 중점적으로 보여주는데 현대가 어우러져야 과거와 미래가 더욱 빛난다”고 말했다.

/글·사진(화성)=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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