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지난 2002년부터 매년 빼놓지 않고 참석하던 행사가 있다.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리는 ‘선밸리 미디어 콘퍼런스’다. 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이는 행사로 이 부회장은 이곳을 자신의 ‘준거집단’ 중 하나로 삼았다. 이 부회장은 권위주의와 허례허식 등을 질색하며 철저히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그가 ‘인사’와 관련해 자신만의 색깔을 처음 드러낸 것이 5월이다. 2014년과 2015년 연말 사장단인사에서는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사람을 존중해 최소한의 조정만 진행했다. 5월 인사를 보면 철저히 ‘실무형’ ‘글로벌 인재’ 중심의 승진이 이뤄졌다. 북미개발팀 등 해외 관련 부서에서 근무했던 황정욱 전무가 무선사업부에서 유일하게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김석기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팀장, 이재승 생활가전사업부 개발팀장은 모두 공학도 출신이다.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관계자는 “가치관이 글로벌 기준에 맞춰져 있는 이 부회장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상당히 젊은 CEO 발탁, 외국인 임원 기용 등 파격적인 인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재계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퇴진으로 ‘이재용 체제’ 전환이 급격하게 이뤄질 것으로 내다본다. 그 시발점은 ‘인사’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이 회장 와병 이후 이 부회장 구속,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 등으로 미뤄진 인사 적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권 부회장(65)을 비롯해 10명의 사장이 만 60세를 넘은 상태고 재직 기간 3년이 넘는 경영진도 65%(20명)에 달한다.
향후 진행될 이재용 인사의 키워드는 △실무형·글로벌 인재 △실리콘밸리 식 경영에 정통한 인물 △과거 호흡을 맞춰본 인물 등이 거론된다. 일본 게이오대와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유학을 마친 이 부회장이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해외파’를 선호하는 것은 잘 알려졌다.
이재용 시대를 이끌 인물은 손영권 삼성전자 전략혁신센터(SSIC) 사장이 꼽힌다. 손 사장은 미국 전장기업 하만 인수를 성사시킨 주역으로 초대 인텔코리아 사장, 퀀텀 아시아태평양 지사장, 오크테크놀로지 CEO, 하이닉스반도체 사외이사 등을 지냈다. 손 사장은 현재 하만의 이사도 맡고 있을 정도로 삼성전자 미국법인의 핵심이다. 손 사장이 이끄는 전략혁신센터는 실리콘밸리 기업과의 교류 및 인수합병(M&A) 등을 주도한다.
데이비드 은 삼성넥스트 사장 역시 이 부회장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하버드대 법학박사로 구글 콘텐츠파트너십 총괄 부사장, 아메리카온라인미디어스튜디오 사장 등을 거친 은 사장은 2012년 삼성에 합류했다. 이후 2014년과 2015년 각각 미국 사물인터넷(IoT) 개방형 플랫폼 기업 스마트싱스와 삼성페이의 원천기술이 된 루프페이를 인수하는 데 기여했다.
일각에서는 2월 말 미전실 해체로 삼성을 떠났던 일부 인물의 복귀도 예측한다. 미전실 출신을 다시 불러오는 데 대한 부담이 있을 수 있지만 그룹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이 더 큰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현호 전 미전실 인사팀장(사장)의 복귀가 유력하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미전실 해체 당시 팀장급 전원의 사표를 받으면서 떠났지만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돌아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미전실 임원이던 김용관 부사장과 권영노 부사장이 안식년을 마치고 각각 삼성전자와 삼성SDI로 복귀했다.
이재용 체제의 또 다른 핵심축인 금융과 물산 부문의 경우 현 사장들에 대한 전망이 엇갈린다. 안민수 삼성화재 사장과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각각 4년, 3년씩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은 이 회장의 인물이면서도 국제경험과 실무감각이 뛰어난 만큼 이 부회장의 인사 코드에도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