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청와대 관계자가 금융당국에 밝힌 금융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의 단편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 업계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17일 “이번 정부에서는 금융을 산업으로 보고 육성하는 정책은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면서 청와대 분위기를 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부가 구체적 방안을 마련했던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방안이 문재인 정부 들어 추동력을 상실했다. 여당과 문재인 정부 이후 힘이 실리고 있는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지난 정부가 금융 산업 육성에 매달리다 감독에 소홀했다며 초대형 IB를 문제 삼고 있다. 지난 8월 실사를 거쳐 9월 초대형 IB 인가를 할 것으로 기대했던 금융위원회도 슬그머니 발을 빼는 분위기다. 자기자본별로 다른 업무영역은 증권사들 내의 경쟁심리를 유발시키며 스스로 발목잡기에 나서고 있다.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JP모건의 파생상품에 대규모 손실을 내며 글로벌 IB 육성을 외쳤던 목소리는 정쟁과 견제에 다시 파묻히고 있다.
①금융은 산업 아닌 지원 도구=윤석헌 금융행정혁신위원장은 앞서 1차 권고안에서 “초대형 IB의 업무범위 확대의 경우 감독행정보다 산업 정책적 고려가 중시된 사례”라고 지적했다. 힘 있는 민간자문기구의 말은 국정감사에 논란으로 확대되며 금융당국 스스로 초대형 IB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하고 있다. 정무위원회 국감에서는 초대형 IB의 업무범위 확대(발행어음, 기업 신용공여 100% 상향 등) 역시 금융 산업 정책이 감독행정 업무보다 중시됐기 때문에 건전성에 대한 기준 없이 결정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렇게 되자 금융당국은 당장 초대형 IB 인가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실무검토를 맡은 금융감독원은 안팎의 채용비리 의혹에 휩싸여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차다. 최종 인가를 결정하는 금융위원회 역시 실무위원회인 증권선물위원회의 효성 분식회계 제재 경감 논란으로 시끄럽고 혁신위까지 초대형 IB의 신용공여 확대 방안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연말 이후로 인가가 늦어지는 분위기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혁신위와 정치권이 초대형 IB 인가 과정에서 대주주 적격성과 자본 건전성을 함께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혁신위는 초대형 IB 인가 증권사가 은행보다 자본 건전성 규제가 완화돼 있고 같은 증권사 중에서도 NH투자증권(005940)과 KB증권 등 은행계 지주 증권사는 미래에셋대우(006800)처럼 일반 증권사보다 건전성 규제가 많은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②금융당국 막바지 인가 올 스톱=금융당국이 잠정 연기한 초대형 IB 인가에 대해 혁신위와 정치권은 아예 근본적 수술을 주문하고 있다. 혁신위는 업권별 규제차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면서 첫 단계로 연말까지 인가 정책 개선안을 권고할 예정이다. 초대형 IB도 이 같은 개선안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근본적으로는 초대형 IB의 출현이 국가사업으로 추진된 것 자체가 우리나라 관치금융의 허상을 보여준 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주식 매매 수수료에 의존해온 증권사에 기업 금융 역량을 높이겠다며 자본확충을 유도하기 위해 자본 규모를 3조·4조·8조원으로 기준을 나눠 허용 업무를 넓혔다. 이에 호응해 미래에셋대우를 비롯, NH투자증권·KB증권·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 등이 유상증자나 인수합병을 통해 자기자본을 늘렸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 정책 방향이 달라졌고 이들 증권사는 최악의 경우 늘린 자본을 놀릴 판국이다. 미래에셋대우 관계자는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주주를 설득해 자본을 늘렸는데 하염없이 늦어지면 신뢰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석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관치가 발달한 일본에서조차 초대형 IB는 경쟁이 치열한 증권사가 주도해 IB를 강화하고 정부는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시장이 커왔다”면서 “증권사 간 경쟁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가 자본 규모를 정해 인가 정책으로 추진하니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③은행 견제와 증권사의 자중지란=정치권에서는 야당인 자유한국당까지 자기자본 8조원 이상 증권사에 허용한 종합투자계좌(IMA)는 원금보장 상품으로 은행과 예금과 유사한데 규제는 풀려 있다며 자기자본이 유일하게 8조원에 근접한 미래에셋대우에 대해 특혜 논란을 제기했다. 초대형 IB 관련 법안을 논의 중인 국회 정무위는 은행 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초대형 IB에 대해 자기자본의 200%까지 신용공여(대출)을 허용하되 중소기업에만 한정하도록 가닥을 잡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초대형 IB 정책을 주도했던 자유한국당의 지적은 일정 부분 증권사 내부 견제가 국감을 통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초대형 IB가 상업은행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자 은행권의 견제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초대형 IB에 대한 신용공여 기능이 IB 육성 방안의 당초 취지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단자사의 전철을 밟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13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기자들은 만나 하 회장은 초대형 IB의 신용공여에 대해 “사자(초대형 IB) 보고 소(은행)처럼 여물을 먹으라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사자는 사냥을 해야 하는데 대출만 하면서 여물을 먹겠다고 하면 결국 사자는 탈이 나서 못 견디고 DNA도 바뀌게 된다”고 지적했다./임세원기자 wh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