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출신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준이 제주의 자연과 어우러지게 디자인한 포도호텔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포도송이처럼 탐스러운 자태를 드러낸다. /사진제공=SK핀크스
일제 공군 전초기지로 상흔을 가진 알뜨르비행장은 제주비엔날레를 계기로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제공=제주문화재단
마흔에 요절한 이중섭에게 제주에서의 1년 남짓한 기간은 황금이였고 서귀포시 이중섭거리는 그의 예술혼을 기리고 있다. /사진제공=제주문화재단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도 제주를 일컬어 누구는 골프의 섬이라 하고, 누구는 예술의 섬이라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정규대회가 최근 국내 최초로 제주에서 개막한 데 이어 오는 27일부터는 SK핀크스·서울경제레이디스오픈이 사흘간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매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미술주간(10월13~22일)’ 행사가 선정한 ‘2017년 올해의 미술도시’가 바로 제주다. 건물 주변의 회랑이나 길쭉한 방에 작품을 전시하던 것이 갤러리의 어원이 됐고 골프 관람객을 뜻하는 갤러리 또한 늘어선 화랑을 연상시키며 골프 중에는 작품을 관람하듯 조용히 예절을 갖춰달라는 의미를 품고 있으니 예술과 골프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관광 낙원 제주에서 골프 갤러리들이 가볼 만한 건축 명소와 미술관·박물관 등을 찾아다녀 봤다.
이른바 ‘제주 아트투어’를 SK핀크스GC 클럽하우스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이곳은 재일교포 2세 건축가 이타미준(1937~2011·한국명 유동룡)의 작품이다. 그는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났지만 늘 한국을 그리워했고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았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기 전 좌우의 목조 기둥을 보자. 왼쪽 기둥은 팔각인데 오른쪽은 사각이다. 하나는 불국사의 다보탑이요, 나머지는 석가탑을 상징한다. 한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한 이타미준이 통일신라 문화에서 포착한 정수를 건축에 담았다.
발길을 조금 옮겨 닿은 포도호텔 또한 그의 작품이다.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은 이타미준이 국립기메동양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주요 작품으로 소개된 건축물이 바로 포도호텔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동글동글 탐스러운 포도알을 닮아 이름 붙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연미 자체였다. 제주의 작은 화산인 오름에서 나지막이 부푼 형상을 따왔고 초가집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래서 어느 곳 하나 딱딱한 부분이 없다. ‘열림과 닫힘’을 주제로 잡은 건축가가 자연을 결코 거스르지 않는 건물인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려 한 노력이 특히 돋보인다. 호텔의 중정에 해당하는 옹달샘이라는 뜻의 캐스케이드가 특히 그렇다. 안에서 보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원형 정원이지만 천장 없이 외부와 연결돼 실내에서 음미하는 외부 공간이 된다. 안인 동시에 밖이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에는 비가 그대로 쏟아져 내리며 가을바람과 겨울의 눈까지 고스란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원래는 유리문이 여닫혀 꽃을 만지고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닫아뒀다. 호텔 복도를 따라 걸으면 자연을 만끽하라는 건축가의 배려가 느껴진다. 틈틈이 마련해둔 창은 자연광이 들어올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을 담아 보여주는 액자가 된다. 지금은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춤추는 억새풀이 한창이다. 감물로 색을 들인 자연 색감의 벽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른 허리춤까지 내려온 창호가 햇빛을 은은하게 걸러주는 동시에 다른 투숙객의 얼굴을 가리는 배려로 작동한다. 맨 안쪽 스위트룸 123호 앞에서야 비로소, 그간 반쯤 가렸던 자연의 맨얼굴을 앉아서 감상하라는 건축가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 곳곳에 걸린 그림은 변시지·문봉선·이왈종 등 주로 제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다.
이타미준이 설계한 풍박물관은 길따란 복도를 걸으며 때로는 돌 위에 앉아서 바람소리를 음미하게 이끈다. /사진제공=비오토피아
이타미준의 작품은 골프장 인근의 비오토피아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물·바람·돌 그리고 지중박물관이다. 자연을 따라 거닐며 감상할 수 있는 공간들이다. 햇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반사가 달라져 각기 다른 하늘을 비추는 수(水)박물관, 복도를 걷거나 돌 위에 앉아 나무판 틈새로 바람이 통하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풍(風)박물관, 손 모양의 돌 조각과 멀리 보이는 산방산이 대비를 이루는 석(石)박물관이 펼쳐진다. 손 모아 기도하는 형태로 만든 두손지중(地中)박물관까지. 이쯤 오니 왜 ‘핀크스’라 이름 붙였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라틴어로 ‘신의 서명’을 뜻하는 핀크스는 신이 그림을 그린 듯한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한다. 자연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준 이타미준의 헌사는 그래서 탁월한 명작으로 꼽힌다. 이곳 비오토피아가 개인 주택지이기 때문에 수풍석박물관은 비오토피아 주민자치회에서 평일 오전10시30분과 오후4시, 두 번만 최대 25명 예약제로 방문을 허락한다. 사유지임에도 공유하려는 노력인지라 사전예약의 번거로움은 감수할 만하다.
본태박물관은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와 한국의 전통담장이 교차하는 곳으로 그 주변을 잔잔한 냇물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제공=본태박물관
핀크스골프장 이스트코스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본태박물관이다. 진입로에 채 닿기도 전부터 잔잔하게 찰랑이는 물결이 보인다. 냇물이 떠받치는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일본 출신의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지난 2012년 개관한 이곳은 인류 본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해 ‘본래의 형태’라는 뜻으로 박물관 이름을 지었다. 다채로운 소반과 보자기, 전통 자수공예와 화각함이 눈을 뗄 수 없는 볼거리다.
감귤농장 내 옛 농가 창고를 개조한 중선농원의 갤러리2에서는 현대미술가 이동기의 개인전이 한창이다. 자연 속에 들어앉은 갤러리라는 점에서 독일 예술명소 인젤 홈브로이히를 닮았다. /조상인기자
발길을 옮겨 제주시로 향해 ‘중선농원’을 찾아갔다. 서울 청담동의 갤러리2가 지난해 이곳으로 옮겨 ‘갤러리가 된 감귤농장’이다. 독일 뒤셀도르프 남쪽 소도시 노이스에 있는 인젤 홈브로이히를 떠올리게 하는 자연 속 예술공간이다. 나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전시장은 옛 농가 창고로 자연 채광을 위해 벽을 그대로 둔 채 반투명 플라스틱 패널을 끼워 지붕만 높였다. 미술가 이동기의 개인전이 한창인 전시장에 들어가면 옛 창고의 흙벽이 고스란히 남아 시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곳은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명예교수의 농원인데 부인의 제안으로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제주시 탑동로의 옛 극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는 붉은색 외관으로 한눈에 띈다. 세계 200대 컬렉터로 꼽히는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컬렉션을 상설전으로 만날 수 있다. /사진제공=아라리오뮤지엄
다향(茶香)이 울려퍼지는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의 티스톤 외관은 먹과 벼루를 닮았다. 인근에 추사 김정희 유배지도 있어 선비정신을 음미하기에 좋은 곳이다. /사진제공=오설록티하우스
쇠락한 제주 원도심을 되살린 아라리오뮤지엄, 추사 김정희 유배지 옆에 자리 잡아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는 오설록 티뮤지엄, 특히 남자 어른의 향수를 자극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까지 생각하게 하는 넥슨 컴퓨터박물관까지. 가볼 데가 너무 많은 제주다. 시간이 아깝다.
/제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