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
나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을 누군가 거리낌 없이 하고 있을 때는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건 저희 부서 소관이 아닌데요.” “그건 그쪽 사정이지.” “남의 일에 신경 끄시죠.” 이런 문장을 들으면 그 아래 깔려있는 냉혹한 무관심과 책임회피의 심리가 가슴을 할퀸다. ‘어렸을 땐 이런 말을 별로 듣지 못했는데’하는 안타까움도 밀려든다. 일단 직접적으로 자신이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열리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따스함이 아닐까. 영어 문장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None of your business.(상관 마시죠)’ ‘Mind your own business.(당신 일이나 신경 쓰지 그래)’ 이런 문장을 자주 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철통같은 방어벽이 둘러쳐 있는 것 같다. ‘남의 일에 신경쓰는 사람은 질색이야’, ‘그 누구도 내 일에 상관하지 않도록 만들겠어’, ‘절대 손해보는 일은 없어야지.’ 이런 마음의 방어벽이 말이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박는 ‘단절의 언어’다.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우리 일’과 ‘남의 일’ 사이에 확실한 구분선을 긋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사이에 명확히 울타리를 친다. 하지만 이런 구별짓기의 말들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렇게 경계 짓고, 말뚝을 박고, 방어벽을 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통을 혼자 안으로 삭이며, ‘이 세상은 차갑고 무서운 곳이야’라는 생각 속에 자신의 잠재력을 가두어버린다. 우울증은 ‘의미를 찾지 못한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마침내 치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는 수많은 이유로 슬픔과 우울, 절망과 고립감을 느끼지만 그 고통에 이것저것 ‘이름’을 붙여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만들기보다는 그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연결의 언어들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고통이라는 그림자를 통해 오히려 친구와의 우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고통의 그림자를 공유한 사이기에,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힘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관계였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문장 중에 이런 것이 있다. “Don’t be a stranger(연락 하고 지내자).” 나는 이 말의 ‘직역’ 버전이 더 좋다. 낯선 사람이 되지 마. 이방인이 되지 마.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이런 따뜻한 말들은 ‘낯선 사람’이나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고립감을 자아내는지를, 그런 말들이 얼마나 잔혹한 ‘단절의 언어’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작가 E.M.포스터는 말했다. “다만 연결하라.” 상관없어 보이는 것, 서로 아무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연결할수록,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 모든 것들을 연결하여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보려는 눈물겨운 안간힘. 거기서 창조성의 기적이 태어나고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이뤄지는 눈부신 관계의 기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