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석 박사가 서울 인사동의 예성화랑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며 웃고 있다. /송은석 기자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책의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짐) 덕이죠.”
아들(세드리크 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디지털경제·정부투자부문 보좌관, 한국명 영택)과 딸(델핀 오 프랑스 집권당 하원의원, 한국명 수련)을 프랑스 리더로 키워낸 오영석(69) 전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INSA) 교수는 지난 10월31일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30대 자녀를 모두 프랑스 지도층으로 키워낸 비결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오 전 교수는 고려대 화학과, 프랑스 리옹대 석사과정, INSA 박사과정을 거쳐 기업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1992년부터 INSA 교수로 근무한 뒤 2004년부터 6년간 KAIST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운을 뗀 오 박사는 “집에서 TV를 없애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매일 책을 읽어주고 매주 도서관에도 같이 간 것이 아이들이 사고의 폭도 넓어지고 글도 잘 쓰게 돼 리더로 성장한 비결이 됐다”며 “공부하라고 해본 적은 없고 ‘베풀며 살고 국제적인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아이들이 ‘차이니스’라고 놀림당하며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지만 ‘너희는 두 개의 문화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고 의젓하게 사춘기도 모르고 지나갔다. 스스로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임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한국보다 심한 학벌 사회인 프랑스에서 아들은 그랑제콜(상위 2%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에서도 상위 상경계열인 오트 에골 드 코메르스, 딸은 프랑스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반은 프랑스인, 반은 한국인이라고 교육했죠. 성이 ‘오(O)’ 한 글자인데 성씨에 자부심이 있죠. 오씨 왕조를 세우겠다고 한다니까요(웃음). 둘이 대학 때도 매년 한국에 오고 언젠가 6개월씩 머무르며 한국어와 문화를 익힌 적도 있어요.”
Cedric 영택의 프랑스 엘리제 대통령궁 사무실 앞에서 Cedric 영택(왼쪽부터), Delphine 수련(두번째), 오 박사(오른쪽)가 웃으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오영석 박사
그의 아들은 정치컨설팅회사에서 일하다가 재무부에 발탁돼 당시 마크롱 장관과 호흡을 맞췄고 ‘현장 경험을 해야 한다’며 비행기엔진 제조사(샤프란)로 옮긴 뒤 당(레퓌블리크 앙마르슈)을 공동 창업한 동지다. 엘리제궁에 상근하며 지근거리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다. “영택이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하고 맨날 놀고 학생회 책임도 맡고 정치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이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대선 후보를 돕다가 낙마하자 프랑수아 올랑드 팀에 합류해 당선된 뒤 재무부에 들어갔죠. 이때 장관이던 마크롱과 죽이 잘 맞았어요. 샤프란에 다닐 때도 현장책임자를 자원했고요, 정치할 때는 재무담당 등을 맡아 마크롱 집에서 회의하고는 했죠.”
딸은 중동 전문가로 마크롱의 외교특보로 합류해 6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뒤 외교통상위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수련이는 졸업 후 교육 관련 벤처에서 일하다 미국 뉴욕 프랑스총영사관에서 근무하며 하버드케네디스쿨에 다녔죠. 놀기도 잘해요. 싱크탱크에서 일하다가 서울의 프랑스대사관에서도 근무하고 비정부기구(NGO)로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가 이란으로 넘어가 페르시아어도 배우며 한참 있었죠. 중동을 다 돌아다녔고 한 번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자기네 소수민족으로 착각하기도 했대요.” 페르시아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 10여개 언어를 구사하는 딸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이란 정보를 기업에 제공하는 벤처를 창업(레터 프롬 페르시아)한 후 글을 쓰고 강연을 하다 정치에 뛰어들었다.
자녀들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 박사의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4년 반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미국 미사일을 분해·복제해 한국 최초로 미사일을 개발할 때 참여했죠. 그때 단체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는데 재미있어 열심히 하다가 강사와 사귀게 됐어요(웃음). ‘왜 프랑스 여자랑 사귀느냐’며 간첩으로 일부 오해도 받았습니다.” 오 박사는 1978년 아예 프랑스로 건너가 석사·박사 과정을 거치며 고분자·신소재를 공부한 뒤 국책화학회사에서도 근무하고 연구소에도 있다가 INSA 교수로 열정을 불태웠다. 박사과정 중 결국 그 강사와 결혼해 1982년 아들, 1985년 딸을 낳았다. 하지만 2003년 문화적 차이가 커지며 이혼을 결정하게 된다.
“제가 10년 넘게 재불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도 하고 몇 년은 재유럽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장도 했어요. 지금도 개도국의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을 지원하는 NGO를 하지만 김대중 정부때 북한 박사도 참여한 협회를 만들어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디지털 교육을 했죠. 재외국민이고 당시는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했던 때라 활동에 제약이 없었어요.”
오 박사는 한국이 고속철도(KTX)를 프랑스 알스톰에서 들여올 때의 비화도 털어놓았다. “정부가 국제 프로토콜도 무지하고 기술 이전이나 가격 면에서 내용도 잘 모르고 임하길래 YS때 장관을 찾아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죠. 기술 이전과 관련한 한·불세미나도 열면 좋겠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반영도 안 되고 정부나 정보기관 등에서 욕만 되게 먹었죠. 고속철도 도입 과정에서 ‘돈이 많이 샜다’는 얘기도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그의 회상은 이어진다. “프랑스에서 이것저것 해준다고 했지만 결국 거짓말한 셈이 됐고 고속철도건설공단에도 가고 교통부에도 갔지만 욕만 먹었어요. 정부가 오퍼상 농간에 놀아난 거죠. 한불 세미나와 관련한 서류도 프랑스 장관에게 건네지는 바람에 프랑스 측에서 ‘오영석이 기술 조사해 한국으로 보냈다’며 한참 동안 도청하고 감시했어요.” 알스톰을 독일 ICE와 경쟁시켜 가격도 낮추고 기술 이전도 받았다는 정부 평가와 사뭇 상반된 얘기다.
오 박사는 KAIST 초빙교수 시절 세계 대학과의 협력과 외국인 학생 유치 등의 경험도 소개했다. “프랑스는 학교가 학생 위주인데 우리나라는 교수 위주예요. 그랑제콜은 체계적인 해외연수와 현장실습을 의무화하고 스스로 계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훈련을 시키죠. 질문도 막 쏟아지는데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오영석 박사 가족이 프랑스 엘리제 대통령궁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박사(왼쪽부터), Cedric 영택(세번째), Delphine 수련(네번째), 며느리 Berengere(중앙), 사돈 Thierry(예비역 공군소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제공=오영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