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하러 갔다가 헛걸음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피해를 입으면 고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경찰서 문을 두드리지만 상당수는 형사 사건으로 채택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경찰은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수사민원인에게 고소장 작성 이전 단계부터 변호사와 함께 전문적인 법률상담을 제공하는 ‘수사민원상담센터’를 전국 75개 경찰서에서 운영하고 있다. 시민들이 상담을 의뢰하는 대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민·형사 사건 구별법을 알아본다.
●빌려준 돈 못 받았다면
지인관계선 대부분 차용증 안써
고소장 접수 안되는 경우 많아
문자 등 대화내용 최대한 확보를
경찰에 따르면 수사 의뢰가 가장 많은 사건은 애인·친구 등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결론부터 보면 지인 간 단순 돈 문제로는 형사 고소장이 접수되기 쉽지 않다. 지인 관계일수록 차용증 등 직접적인 증거 없이 돈거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형법상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를 기망해(속여) 재산상 이익을 취득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애초에 가해자가 돈을 갚을 능력과 의도가 없었음을 입증해야 하지만 연인 등 지인 관계는 평소 상대방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만큼 속았다고 인정받기 어렵다. 아울러 가해자가 연인 등 특별했던 관계를 부각하며 “빌린 돈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에게 사용하라고 줬다”고 대응하면 반박하기 어려운 현실적 측면도 있다.
천범석 강남경찰서 민원상담센터 수사관은 “흔히 의뢰인들이 계좌이체 내역이나 변제기한 등이 적힌 차용증을 제시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오히려 차용증에 사용용도 등이 적혀 있으면 기망 행위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차용증에 사용용도와 변제 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데도 상대방이 어겼다면 사기죄로 판단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천 수사관은 “심증으로는 사기범죄가 명확해 보여도 애초에 약속한 방법으로 돈을 사용하고 못 갚은 경우라면 현실적으로 사기라고 보기 어렵다”며 “오히려 연인 사이라면 돈을 빌려줬을 당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나 문자 등으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최대한 확보해 제시하면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더라도 이런 종류의 사건이 기소처분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절반도 안된다.
돈을 갚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달라고 경찰에게 부탁해도 경찰은 응하지 않는다. 경찰은 민사불개입 원칙에 따라 개인 간 분쟁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경찰관은 “돈 빌려준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며 경찰서를 찾아오는 분들이 많지만 이것만으로는 수사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면서 “다만 명백한 민사 사안이라도 민원인이 반복적으로 요청하면 수사에 응하는 경우는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투자후 사기 의심땐
투자금 다른 용도 사용 입증해야
피해 금액 크거나 피해자 많으면
입증 안되더라도 수사할 수 있어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의도한 만큼 수익을 얻지 못했을 경우 투자모집책을 사기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사례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투자금유치 범죄혐의로는 투자사기·유사수신행위·횡령 등이 있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 때 별도의 반환약정이나 해제 사유가 없다면 단순 투자금 반환을 위한 고소는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다. 수사를 의뢰하는 민원 상당수는 사전에 약속한 만큼 부동산 가격이 오르지 않거나 주변 시세보다 비싸게 사서 피해를 봤다는 경우가 많아서다.
우봉환 서초경찰서 수사민원센터 팀장은 “투자사기죄는 투자금을 실제 사업운영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대형 유통시설 입주 예정 등과 같이 허위광고한 사실이 관할 구청 등을 통해 입증할 수 있을 때 성립된다”면서 “다만 사기 행위가 입증이 어렵더라도 피해 금액 규모가 크거나 동일한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가 여러 명이라면 경찰이 수사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금천경찰서에서 법률상담을 하는 한민희 변호사는 “피해 금액이 크지 않은 개별 거래 사건은 경찰이 수사하지 않는 점을 악용해 여러 명에게 손해를 끼치는 범죄자가 많다”면서 “만약 같은 수법을 반복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혐의로 경찰이 수사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조언했다.
●상사한테 모욕감 느꼈다면
현장 상황 보여주는 증거 확보해
불특정 다수에 전파 가능성 증명
녹취·동영상·목격자 진술 등 필요
최근 명예훼손이나 직장 내 모욕죄로 수사를 의뢰하는 사례도 부쩍 늘고 있다. 형법 제311조의 모욕죄는 사실에 대한 표현 없이 글·말·동작 등으로 다른 사람의 사회적 평가나 명예감정을 훼손하는 범죄다.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할 수 있다.
모욕죄가 성립되려면 공연성(불특정 또는 다수인에 대한 전파 가능성)이 입증돼야 한다. 하지만 공연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통상 10건 가운데 8건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된다는 게 일선 경찰관들의 전언이다.
천 수사관은 “모욕죄를 신고하는 사람이 현장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를 확보할수록 유리하다”며 “최소 2~3명 앞에서 문제의 발언이나 행동 등이 행해진 것을 증명하려면 녹취나 동영상 촬영 또는 목격자 진술 등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진용기자 yongs@sedaily.com